▲대롱대롱 매달려 육신과 혼을 다 먹고 자란 자식들. 왜 그리 줄줄이 낳아서 이 고생시키느냐는 말만 안 꺼내도 효자지.김규환
어머니를 대신했던 옆집 아짐
예전 본가가 있던 전남 화순 북면 방리에서 병문이와 나는 바로 옆집에 살았다. 대문 하나가 마주 보고 있던 지척이었으니 급할 땐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종용하기도 했다.
둘은 단짝이었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 9년 동안 한 시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을 정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립문을 열고 헛기침 한번하고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도 되는 이물 없는 사이였다.
"아짐, 저 왔어라우."
"그려 언넝 와. 밥 묵었냐?"
"예."
"안 묵었으면 한 술 떠라."
"배부른디요."
"글면 이거라도 맛 좀 봐라."
"됐다글도 그요."
"여기가 니 집이나 한가진께 사양하지 말고 묵어라 이놈아."
"고맙습니다."
어릴 적엔 밥 먹고 돌아서면 소화가 다 되곤 했다. 주시는 대로 또 받아먹어도 아무 탈이 없었다. 그 탓인가. 나는 밥을 한 끼라도 놓치면 온 몸에서 열이 나다가 조금 더 지나면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오기 시작한다. 지금껏 살면서 많이 먹어 탈 난 적이 한번도 없는 '속 좋은 놈'이 된 건 그런 배경과 오랜 경험에 단련된 까닭일 지도 모르겠다.
병문이 어머니를 나는 '아짐'이라 불렀다. 아주머니는 연세도 어머니와 비슷했다. 어머니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뒤로도 홀로 되신 아버지와 아직 학교 다니고 있는 우리 형제들을 하루에도 두세 번 드나들며 돌봐 주셨다. 그런 이웃 아주머니 덕택에 한동안 어머니 잃었던 슬픔을 까먹고 지내도록 건사하셨다.
친구가 가정 형편으로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멀리 부산으로 떠난 뒤로도 2주에 한번씩 시골 집에 가면 언제나 우리 집인 듯 가서 인사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짐 계시오?"
"응 학교 갔다왔냐?"
"너는 공부를 잘 헝께 고등학교도 가고 낸중에 서울로 대학도 간담시롱…."
"제가 잘해서 그렇간디요. 병문이도 다시 학교 다니면 되지라우."
우리집 마룻바닥은 걸레질을 하지 않아 먼지가 자욱했지만 아짐댁은 무엇 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깔끔했다. 마루에 걸터앉아 도란도란 나누는 모양이 영락없이 어머니와 아들간의 대화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아짐은 평소 드시지 않고 아껴두셨던 한과(韓菓)나 식혜 등 군것질도 되고 배도 채울 수 있는 음식을 꺼내와 먹으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