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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상에 발표하는 글을 가끔 어머니께 읽어드리곤 한다. 어머니가 등장하는 글은 꼭꼭 읽어드리고, 가족이 고루 등장하는 글일 경우에는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낭독회'를 열기도 한다.
딸아이가 천안으로 고교 진학을 한 지난해부터는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의 낭독은 뜸하게 되었지만, 어머니께 읽어드리는 일은 줄지 않았다. 아내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 교실마다 있는 컴퓨터로 내 글을 읽지만, 이미 읽은 글도 내가 낭독을 할 때는 즐겨 들어준다.
천안에서 공부가 바쁜 가운데서도 아빠의 글들을 챙겨 읽는 딸아이와 달리 중학생 아들 녀석은 컴퓨터 앞에 앉으면 게임에 열중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도 아빠가 모니터의 글을 읽을 때는 귀담아 들어준다.
간혹 어떤 민감한 현실 사안을 다루는 글 중에 가족들이 등장할 경우에는 그 글을 웹상에 올리기 전에 낭독회를 열고 수정과 보완을 거친 다음 발표를 하기도 한다.
며칠 전에도 어머니께 웹상에 발표한 글 하나를 읽어 드렸다. '내 양말을 기워주시는 어머니'라는 글이었다. 어머니가 등장하는 글이니 당연히 읽어 드려야 하고, 또 어머니께만 읽어 드려도 되는 글인데, 거실에서 신문과 만화책을 보던 아내와 아들녀석도 귀담아 들었으니 또 한번 낭독회를 가진 셈이었다.
재미스러운 표정으로 내 글을 다 들으신 어머니는 한가지 빠진 것이 있다고 했다. 이왕 그런 이야기를 쓰려면 밤마다 등잔불 앞에서 양말을 깁는 것이 일이었던 시절의 풍경 이야기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씀이었다.
"그 얘기두 쓰구 싶었이유. 그런디 그 얘기꺼지 쓰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어서, 그 등잔불 시절 이야기는 나중에 별도루 쓰기루 마음먹었지유."
이런 내 말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럭혀. 등잔불 얘기두 한번 쓰면 재미있을 겨."
그때 아들녀석이 비스듬히 누웠던 몸을 일으켜 앉으며 "등잔불이 뭐예요"하고 관심을 표했다.
"아니, 중학생 녀석이 여태 등잔불두 모르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한 번두 듣지두 보지두 뭇헌 건디…."
엄마의 핀잔에 아들녀석이 항변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내 뇌리에 성냥불 켜지듯이 짚이는 게 있었다.
"가만있어. 내가 그 등잔을 보여 줄게."
그리고 나는 책 창고나 다름없는 골방으로 들어갔다. 책 더미 위로 한구석에 보관되어 있는 등잔대와 아직 비닐 보자기에 쌓여 있는 사기등잔을 꺼내왔다. 이태 전쯤에 한 장애인협회에 5만원을 후원하고 택배로 받은 선물이었다. 훗날 이사를 해서 좀더 넓은 공간에서 생활하게 되면 옛날 등잔불 시절을 추억하는 일에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대로 보관하고 있던 물건이었다.
나는 비닐 보자기를 벗긴 사기등잔을 거무티티한 색깔의 나무로 만들어진 등잔대 위에 올려놓았다. 등잔 뚜껑을 열고 뚜껑 구멍에 끼워져 있는 심지를 아들녀석에게 보여 주었다.
"이거를 심지라구 허는디, 헝겊 쪼가리루 맹근겨. 이 등잔 안이다가 섹유를 늫거든. 그리구 이 심지를 늫으면 섹유가 심지를 타구 위루 스며 올라올 것 아니냐. 그래갖구, 이 꼭지 위루 조금 솟아 나와 있는 이 심지 끝이다가 성냥불루 불을 붙이면, 섹유가 다 말를 때까지 불이 타는 겨. 알겄냐?"
"근디 섹유가 뭐예요, 석유지."
"그러구, 아주 옛날 섹유가 읎던 시절에는 식물성 기름으루다가 등잔불을 켰디야. 식물성 기름은 아무래두 섹유보다 불이 들 밝었겄지."
아들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성경책과 기도서, 꽃병, 양초, 성냥갑이 올려져 있는 거실 한쪽의 '기도상(祈禱床)'을 보며 다시 물었다.
"저 촛불허구 등잔불허구 어떤 게 더 밝아요?"
"촛불이 훨씬 밝지. 이따가 밤에 전깃불 끄구 초 하나만 불을 켜봐. 그러면 촛불보다 들 밝은 등잔불의 광도를 충분히 짐작헤 볼 수 있을 거다."
"지금두 짐작헤 볼 수 있어요. 촛불 밝기를 제가 잘 아니께요. 그런디 촛불보다두 덜 밝은 등잔불 앞에서 무슨 일을 했대요? 할머니가 양말두 꿰매셨어요?"
이제부터는 어머니가 대답을 하실 차례였다.
"그럼. 밤마다 등잔불 앞이서 양말 꿰매는 게 일이었어. 옛날엔 왜 그렇게 양말이 잘 떨어졌는지 물러. 그저 새 양말두 하루만 신으면 빵구가 나구 헸으니…. 그 시절에는 어뜬 집이나 다, 또 즘잖은 으른들두 꿰맨 양말 신구 댕기는 게 별루 숭이 아니었어. 그런디 지금 생각허면 등잔불 앞이서 바느질을 허구 심지어는 바늘귀에 실을 꿰구 헌 게 참 용혀. 내가 암만 젊었을 때라구 헤두…."
"등잔불 앞이서 바느질만 허셨남유. 내복 숙이서 이를 잡구, 등잔불이다가 서캐 끄실리구 헌 것두 얘길 허셔야지유."
"어린 손자헌티 내가 그 얘기꺼지 허얀다나."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그 시절 이야기를 아끼지 않았다. 긴 겨울밤에는 우리 어린 남매들의 내복을 훌러덩 벗겨서는 등잔불 앞에 한참씩 앉아 내복 속을 세심하게 살피며 이를 잡곤 했다. 우리는 알몸으로 이불 속에 웅크리고 누워서는 어머니 쪽으로 귀를 모으곤 했다. 어머니의 손에서 찍 소리가 나면 이를 한 마리 잡은 거였다.
"이눔은 워낙 통통하게 살쪘네. 사람 피를 이렇게나 빨어먹구두 니가 온전헐 줄 알었냐."
하면서 어머니를 이를 잡았다. 어머니의 양손 두 엄지손톱에는 금세 빨간 핏물이 묻고, 잡혀서 으스러져 죽은 이의 잔해들이 티끌처럼 묻었다. 어머니는 이를 잡아서 요강에다 넣기도 했지만 대개는 양손 두 엄지손톱 사이에다 끼우고 정확히 눌러서 죽이곤 했다.
가끔 등잔불이 찌직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건 서캐를 그슬리는 소리였다. 내복의 은밀한 섶 사이 서캐들이 있는 부위는 등잔불에다 살짝살짝 대서 태워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때로는 깜박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등잔불에 머리칼을 그슬리기도 했고….
방에서는 가끔 빈대와 벼룩이 발견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DDT를 사다가 방 구석구석에 뿌리고 한나절씩 문을 닫아놓기도 했다. 어머니는 식구들의 옷을 자주 삶고, 내복 속에다 DDT 가루를 뿌리기도 했다. 그래도 이가 완전히 박멸되지는 않았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저녁마다 등잔불 챙기는 일을 담당했다. 이 방 저 방의 등잔들을 내다가 석유를 붓고, 불에 탄 심지 끝 부위를 조금 잘라내고, 그렇게 여러 번 끝을 잘라내서 전체 길이가 짧아진 심지는 빼서 버리고 헝겊 조각으로 새 심지를 만들어 끼우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중학생 시절부턴가는 등잔이 남포로 교체되어서 남포의 유리를 깨끗이 닦는 일이 추가되었다. 남폿불이 등잔불보다야 훨씬 밝아서 좋지만, 일은 더 많아진 형국이었다.
등잔불 시대와 남폿불 시대를 오래 거친 다음,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66년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우리 고장도 전깃불 세상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전깃불 세상을 맞게 되면서 우리 집에서도, 이웃집들에서도 점차 이와 벼룩이며 빈대들이 사라지고 가내 해충 박멸의 시대도 맞게 되었다.
전깃불 세상은 밝고 환한 세상임이 분명하다. 문명이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온통 밝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문명의 빛이 커질수록 명암도 더욱 분명해지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문명의 빛과 상관없이 세상 도처의 음습한 그늘들이 마냥 짙어지거나 썩어 가는 이치는 그대로 인간 삶의 한계를 내포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오늘의 문명 세대들이 과거의 등잔불 시대의 풍경이며 애환들을 전혀 모르는 것이야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내가 오늘 옛날 등잔불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왜 나는 어머니가 밤마다 침침한 등잔불 앞에서 양말을 깁고 이를 잡고 서캐를 태우고 하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일까?
문명 세상과 더불어 가내 해충들만 없어진 게 아닌 것 같다. 함께 없어지고 사라진, 내가 마땅히 그리워해야 할 것들이 생각하면 참 많은 것 같은데, 어쩌면 그리운 것들을 그리워할 줄 아는 내 속성 탓일지도 모르겠다. 또 가내 해충들은 거의 없어졌으되 세상의 해충 같은 해악들은 더욱 기승하는 세태에 대한 아픈 인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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