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매화가 피어날 때면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40>공장일기<25>

등록 2004.02.26 13:23수정 2004.02.26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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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아마도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창원공단관리청 공원 곳곳에 서 있는 매화나무 가지에 하얀 매화꽃이 여드름처럼 몽글몽글 피어나는 그런 때였으니까. 그때 매화나무 가지에 하얗게 매달린 매화꽃은 마치 사출기 금형에서 하얗게 떨어지는 제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그날 아침에도 나는 계속되는 잔업과 철야근무에 지친 몸을 억지로 이끌고 사출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출근한 여성 노동자들에게 눈인사를 대충 나누면서 곧장 사출실 안에 마련된 탈의실로 향했다. 다른 업무를 보기 전에 우선 작업복으로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그 탈의실은 남녀 공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라고는 부서장과 나 하나 뿐이었고, 부서장은 출퇴근을 할 때에도 작업복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남자용 탈의실을 따로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나 또한 윗도리만 작업복으로 갈아입으면 되었기 때문에 탈의실에는 별로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옴마야!"
"미...미안합니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인자 클났다아~ 인자 클났다아~"
"내, 내는 아무 것도 안 봤다니까."
"저런 거 보모 남자들은 다 도둑놈이라카이. 고마 봤으모 봤다꼬 당당하게 말하모 누가 잡아 묵기라도 하나."


그때 나는 서둘러 작업복으로 갈아 입기 위해 탈의실을 막고 있는 커텐을 스스럼 없이 비집었다. "어?" "옴마야" 소리가 동시에 난 것도 그때였다. 탈의실 안에는 우리 부서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여성 노동자 한 명이 마악 작업복 아랫도리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살색 내의를 입고 있었던가?

그때 사출실 여기저기에서 쿡쿡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그녀를 마구 놀려대기 시작했다. 볼 거 다 봤으니 나 더러 그녀를 책임지라는 투였다. 게다가 그녀는 내게 자신의 몸 일부를 들킨 게 너무도 부끄러웠던지 탈의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정말 심하네. 탈의실에 누가 있으모 있다고 알려주모 될낀데…. 누가 퍼뜩 들어가서 달래가꼬 나오이소."
"그기 머슨 소립니꺼? 일로 저지른 사람이 들어가가꼬 달래든지 우짜든지 마무리로 해야 될 끼 아입니꺼?"
"내 참! 그라다가 또 머슨 오해로 살라꼬?"


황당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하지만 어쩌랴. 내가 일부러 그녀를 훔쳐보기 위해서 그랬던 것도 아닌데. 하긴 그녀로서는 부끄럽기도 했겠지만 나름대로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날 나는 조그만 탈의실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거리고 있는 그녀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그랬다. 여성 노동자들만 있는 사출실에서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혹은 24시간 내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일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금형이나 제품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또한 그러한 여러 가지 문제점은 내가 당연히 해결해 주어야만 할 업무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부서에는 현장 노동자가 모두 여성이다 보니, 내가 맡고 있는 업무보다 더 난감한 일들이 수시로 생겼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을 능숙하고도 노련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간혹 큰 오해를 받을 때도 많았다. 말 그대로 사출실 곳곳에 복병 아닌 복병이 숨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 내 작업복을 누가 이렇게 깨끗하게 빨아서 다림질까지 해놨지?"
"체! 머슨 남자가 저래 눈치가 없노? 그래가꼬 나중에 장가나 제대로 가겄나."
"어? 이거는 또 뭐꼬? 이거 억수로 비싼 긴데?"
"그 화장품을 바르고 옷을 입을 때마다 곰곰히 생각을 좀 해 보이소. 누가 그렇게 신경을 써주는강."


그랬다. 여자들만 있는 부서에서 남자 혼자 근무를 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간혹 금형이나 제품에 문제가 있을 때에도 그에 따른 문제점을 해결하다가 시간을 조금 길게 끌거나 대화를 많이 하게 되면 다른 여성 노동자들로부터 이상한(?)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래. 그 당시 나와 같이 일을 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나이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이었다. 그만큼 예민한 나이이기도 했다. 또한 계속되는 잔업과 철야근무 때문에 공장 안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런 까닭에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공장 속에 자잘한 감정 하나까지도 거의 다 빼앗기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요새는 시로 안 씁니꺼?"
"와 예?"
"시 한 편 받고 싶어서예."


나는 지금도 매화가 피어날 때면 당시 나와 같이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누렇게 뜬 얼굴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고된 공장 생활 속에서도 남자는 멋을 낼 줄 알아야 한다며 내 작업복을 빨아주고, 화장품을 사 주면서도, 종종 나를 골탕 먹이며 한바탕 크게 웃던 그 여성 노동자들의 따스한 마음이 못 견디게 그립다.

덧붙이는 글 | <계속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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