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신화, 뒤집어 읽기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

등록 2004.03.09 05:02수정 2004.03.09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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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학사
우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이 다루고 있는 신화란 아직도 우리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그리스ㆍ로마 신화와 같은 고대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다루고 있는 신화는 현대의 신화이며 그 주인공들은 신들이 아니라 인간들이다.

서구에서 근대의 등장과 함께 인간은 신이 차지하고 있던 전지전능한 자리를 탈취하였는데, 그때 사용한 무기가 바로 ‘이성(理性)’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신의 자리를 탈취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고대의 신들이 그랬듯이 그 권능을 행사하려고 했다. 그 권능의 행사에 앞장선 것이 이른바 ‘부르주아’라고 알려진 계층들이었다.


‘이성’에 ‘자본’이라는 막강한 화력을 더함으로써 근대의 신으로 군림하게 된 그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유지ㆍ강화ㆍ확대하는 담론들을 생산하여 유포시키기 시작했다. 그러한 담론들 중, 수 세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살아남은 것들은 현대의 신화가 되었다. 바르트가 주목하고 있는 신화란 바로 이러한 부르주아의 신화인 것이다.

바르트가 <신화론>에서 다루고 있는 이러한 현대의 신화들은 몇 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우선 신화는 사회적으로 결정된 것, 다시 말해서 사회에 의해 ‘반영’된 것이다. 지극히 당연하고 자명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도 그 배후에는 그 신화가 유통되고 있는 사회의 선택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화는 자연적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다.

현대의 신화의 두 번째 속성은 그것은 ‘전도된 것’이라는 점이다. 신화는 문화를 자연으로, 혹은 적어도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 이데올로기적인 것, 역사적인 것 등을 ‘자연적인 것’으로 뒤집어놓는다. 구체적이고 특수한 것을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만드는 이런 전도의 효과에 의해서 신화는 ‘양식(良識)’, ‘규범’, ‘일반적인 여론’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한편 현대의 신화는 불연속적인 것이다. 둔갑술에 능한 마법사처럼 신화는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발 빠르게 옷을 갈아입는다. 활판 인쇄에서 전자 매체로 미디어 환경이 바뀌면 그에 따라 새로운 신화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신화들이 불연속적으로 변화한다고 해서, 그 이전의 신화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보다 교활한 ‘신화적인 것’은 여전히 새로 등장한 그 이후의 신화들에도 살아남는다.


마지막으로 현대의 신화는 일종의 빠롤이다. 즉, 신화는 의사소통의 체계로서 하나의 전언(message)인 것이다. 그리하여 신화는 기호학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 책 <신화론>의 제1부의 상당 분량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형식과 개념, 기호와 의미작용 등 소쉬르의 기호학을 원용해서, 신화의 구조와 체계와 특성을 분석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신화는 그 구조에 있어서는 이차적인 기호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의미작용에 있어서는 이중성을 띠고 있다. 즉 신화는 대상언어 위에 덧씌워진 메타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표면적인 의미만으로는 다 말하여지지 않는 의도를 그 밑에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학자의 임무란, 신화의 표면적인 의미 밑에 숨겨진 의도를 폭로하여 신화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이른바 ‘탈신화화’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탈신화화’를 위하여 신화학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지 두 가지 극단적인 방법들뿐이라는 점에서 신화학자의 비극이 생겨난다.

즉, 신화를 해독하는 신화학자는 과학자의 객관성과 작가(시인)의 주관성, 다른 말로 하면 이데올로기와 시, 이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의 객관성을 선택하여 신화가 감추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속속들이 드러낼 때, 신화는 파괴되고 만다. 신화가 파괴되면 신화학자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다. 반면에 시인의 주관성을 선택하여 신화를 순수하게 사물화하여 보게 되면(바르트는 시라는 것을 매우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물들의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의미에 대한 탐구라고 이해한다), 신화는 또다시 신화화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신화학자는 탈신화화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신화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과학자의 객관성과 작가(시인)의 주관성 사이에 자연적인 분리를 가정하는 이러한 전통적인 믿음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현실과 인간을, 묘사와 설명을, 대상과 지식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제2부에 실린 30개의 신화들은 바로 그의 그러한 노력의 결정체들로서, 1954년부터 1956년까지, 프랑스의 일상적 삶에서 채취한 신화들을 해석해낸 것이다.

그 신화들의 목록은 레슬링에서 스트립쇼에 이르기까지, 영화 속의 로마인들에서 휴가중인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가르보의 얼굴에서 아인슈타인의 두뇌에 이르기까지, 현실을 모방하는 장난감에서 인간을 모방하는 신형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가루비누와 합성세제가 그 이전의 액체 비누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신화의 진화이다.

바르트가 보는 견지에서는, 액체비누는 더러움을 완전히 ‘박멸’한다. 이에 반해 가루비누는 더러움을 옷감의 씨줄을 따라 몰고 가 ‘추방’한다. 그리하여 가루비누는 전쟁이 아니라 경찰의 기능을 수행한다.

한편, 합성세제는 깊이와 거품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활용해서 소비자를 심리적으로 사로잡는다. 깊숙하게 때를 빼준다는 광고 멘트는, 얇은 옷감이 깊이를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껴안고 어루만지고자 하는 인간의 은밀한 본능에 호소한다.

풍부한 거품을 쉽게 만들어낸다는 광고 멘트는 욕조 안의 인기배우처럼 행복한 느낌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거품이 합성세제가 지닌 거친 기능을 감미로운 이미지로 위장할 수 있다는 점을 바르트는 지적한다.

70여명의 여류 소설가들을 특집으로 다룬 여성 잡지 <엘르>를 바라보는 바르트의 시선은 이보다 훨씬 비판적이다. <엘르>는 그 특집에서, “여류 문인은 주목할 만한 동물학적인 종을 구성한다. 여류 문인은 별 구별없이 아이도 낳고 소설도 낳는다”고 썼다.

소설과 아이들을 등가로 놓는 이 이야기에는 여류 소설가들에게 있어서 작가의 삶은 모성에 충실해야 얻어지는 것이라는 남성중심적인 시선이 놓여 있음을 바르트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엘르>가 구축하고 있는 이 여성 세계는, “여성은 자신의 직업적인 야망을 다소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의 조건으로 빨리 돌아와야 한다”고 암시하고 있는 규방의 세계이다. 바르트는 그래서 여성 소설가들을 특집으로 내세워 여성을 추켜세우고 있는 듯이 보이는 여성 잡지 <엘르>가 사실은 다음과 같이 속삭이고 있음을 우리에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규방을 폐쇄하세요. 그리고 나서 그 안에 있는 여성을 자유롭게 하세요. 여성이여, 당신은 사랑하고 일을 하고 글을 써야 합니다. 당신은 직업여성이나 여류 문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항상 남성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은 남성과 같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지요. 당신의 질서는 오직 남성의 질서에 종속될 때에만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당신의 자유는 사치입니다. 당신의 자유는 먼저 당신이 당신의 본성에 알맞은 의무들을 인정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당신이 원한다면 글을 써도 좋습니다. 우리 여성들은 그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을 낳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의 운명이니까요.”

이처럼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은 현대 사회의 일상적 삶에서 발견되는 사소한 사물들과 현상들 안에 깃들어 있는 신화들의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그 감춰진 의도를, 우리에게 발가벗겨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는 그의 방식은 앞서 그가 약속했듯이, 과학자의 객관성과 작가(시인)의 주관성이 잘 결합되어 있어 읽기에 즐겁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할 것은, 바르트의 <신화론>에서 다루고 있는 신화들이란 시간적으로 이미 50년 전이고 지역적으로는 프랑스라는 한 나라에 국한되어 있는 신화라는 점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공감하기에는 다소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신화들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려내고 있는 신화의 이면들은 2004년, 여기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매혹적일 것이다. 그 사이에 신화는 그 모습을 여러 번 바꾸었을지 모르지만, 그 바뀐 모습에도 변하지 않는 ‘신화적인 것’을 이 책 <신화론>을 읽으며 우리는 다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신화론(Mythologies)>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지음, 정 현 옮김, 현대미학사 펴냄, 1995년 11월

덧붙이는 글 <신화론(Mythologies)>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지음, 정 현 옮김, 현대미학사 펴냄, 1995년 11월

신화론

롤랑 바르트 지음,
현대미학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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