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적 혹은 후천적 길맹들에게

<아무도 기획하지 않는 자유> 고미숙 지음

등록 2004.03.12 18:47수정 2004.03.24 15:11
0
원고료로 응원



책이 신문 방송에 소개되자 원남동의 '수유+너머' 사무실에는 난데없이 노숙자들이 나타났답니다. 집 없이 길을 떠도는 그들이 집을 찾아가다니요. 미묘한 장면입니다. 밥 지어 맛있게 나눠 먹는다는 소식을 귀동냥하고 열린 밥상에 참여하려 했던 걸까요. 동류 감정을 느끼고 우리 시대의 유목민(homeless)의 메카가 맞는지 구경 삼아 발걸음 했던 걸까요.


강단의 철밥통과 분과 학문의 지정석에 등을 돌린 젊은 연구자들이 날마다 천 개의 고원을 노닐며 펼치는 지적 횡단의 엔터테인먼트. 책이 전해준 '수유+너머'의 첫인상입니다. 멋지지 않나요.

‘도시의 중산층으로 편입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찾는 이라면 박사나 전문 연구원이 아니어도 환영한다는군요. 애초 당신과 나의 삶은 다방면의 동시적인 탐구를 요구하는 미스터리 아닙니까. 생각할수록 자꾸 기웃거리고 싶어지네요.

무릇 공동체란, 하고 입을 떼는 대화가 있다면 저도 한 대목 걸쳐봅니다. 해방신학과 함께 발 디딘 야학, 주부 대상의 무료 한글 강습을 하던 지역 청년회, 마르크스의 책과 시위 현장을 넘나든 전위조직, 잠시 머물던 민중의 당 지구당, 큽럽 밴드의 앨범을 기획한 독립음반사, 탈학교 아이들을 만난 대안학교. 근 20년 안짝의 흔적이군요. 오래 전 일처럼 시치미 떼고 덤덤하게 지내던 차에 책을 만난 겁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사람들이 평소에 어떤 책을 보고 어찌 사용하는지는 'book+ing 책과 만나다'(그린비)를 통해 약간의 정보가 먼저 있었지요.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기계'로 이용하는 것(이진경)'이라는 프롤로그의 곧은 한마디가 정성껏 차려진 수많은 책들의 진수성찬보다 더 강렬한 향신료처럼 다가왔던 기억. 해서 그곳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어떤 모습일지 늘 궁금해하고 있었지요.

책을 덮자 제 머리 속에는 본문에서 마주쳤던 다음과 같은 말들이 떠다니더군요. 우발적인 마주침, 중구삭금(衆口鑠金), 기이한 평온함, 밥을 둘러싼 특별한 훈련, 웃기지 않으면 웃기라도 해라, 앉아서 유목하기, 자신 아닌 것으로 살아가기. 이렇게 단단하고 매끄러운 주술적 개념들을 타고 은근슬쩍 미끄러지며 다른 주제로 이동할 줄 아는 '수유+너머' 사람들의 더불어 사는 일상이 부러웠던 거지요.


이 땅에서 대학물을 먹은 지식인만큼 '고비용 저효율 미해결 대욕망'의 존재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게다가 한결같이 취업, 결혼, 내 집 마련, 자녀 사교육, 이민의 유혹 등 빼다 박은 코스에 몰려있는 병목 현상이 또 어디에 있겠어요. 그곳 사람들이라고 다르지 않을텐데 따로 또 같이 틈을 내고 걸어가면서 즐겁게 길동무하고 있으니 용하다고 할 밖에요.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라는 부제답게 책 말미에는 묵직한 이정표가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더군요. 지혜의 산, 혁명의 바다, 휴머니즘 외부. 그곳 사람들의 5년여 유목은 이제 세계 곳곳과 경기도의 문호리(汶湖里) 텃밭으로 넓어지고 있답니다. 생활과 배움과 명상으로 선순환하는 '인터-코뮈넷'을 꿈꾸는 중이라고 하는군요.


코뮌(Commune)과 네트워크(Network)라. 이 얼마나 오랜 시차를 두고 해후하는 거대한 역사적 조합입니까. "아차! 아니군요." 지은이의 자서전적 보고서를 읽고서도 이럽니다. 당신과 나의 작은 코뮌에서 발견하는 네트워크의 풀린 끈들을 외부로 돌출된 모양 그대로 그냥 놔두는 거지요. 그것이 바로 나날의 초대와 방문으로 이어지며 '코뮈넷'이 되는 동어 반복의 확대 순환일테구요.

다시 돌아봅니다. 그 많은 공동체에서 저는 무엇을 했던 걸까요. 터 닦고 집 짓고 문패 다는 일에 열심이었지 싶네요. 조직을 키우고 더 큰 역할을 자임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 그럴수록 닫힌 존재가 되어 안에서 허물어지고 있었나 봅니다. 그때마다 뛰쳐나와 숨을 고르고 다시 뛰어들었던 이름만 다른 공동체들. 그곳으로 전력 질주하는 동안에는 제가 발 딛고 선 이곳을 돌아볼 여유와 안목이 없었던 거지요.

언제부턴가 그곳 공동체의 허망한 열망에 피로를 느낀 사람들은 저마다 이곳 개인됨의 알뜰한 자리에 정착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저도 그랬지요. 한 개인으로 완성되는 꿈을 꾸었으니까요. 다소간 자유롭고 쾌활했답니다. 이쪽 길로 가다보면 '보보스'니 '웰빙'이니 '아침형 인간'이니 '10억 만들기 프로젝트'니 하는 달뜬 지표들과 심심찮게 만나지요. 그럭저럭 무시하고 수용하고 변형하면서 숨쉬면 되리라 생각했답니다.

허나 어느 순간 제 삶이 두 동강이 나서 휘청거리는 기분이 들더군요. 이런 상태가 한동안 거듭되었습니다. 그곳과 이곳의 경계가 두터워지고 홈이 깊어질수록 두통과 아스피린과 현기증의 악순환이 이어졌지요. 그곳에 고인 역사를 이곳으로 귀향시키지 않으면, 이곳의 출구가 다시금 그곳으로 나있지 않으면, 겉만 멀쩡하지 완전히 폐인이 될 것 같았습니다.

나름대로 몸부림을 쳤지요. 기회 있을 때마다 타인의 길에 동행하는 것. 길 너머에 인생의 출퇴근로 없이 겹쳐져 있는 무성한 숲을 발견하고 빠져드는 것. 내 길이 아니라고 여겼던 길에서 원래부터 내 길 인양 예비했던 길을 만나는 것. 길 벗어나면 얼마나 많은 길들이 있는지 겪어보는 것. 가는 족족 길이 되는데 가다 아니 가도 간만큼 길이 된다는 것.

"나는 선천적 길맹이다."

지은이의 말입니다. 문맹이 글을 깨치고 몸치가 춤을 추는 희열을 일생 단 한번이 아니고 나날이 축제처럼 맛본다면 얼마나 흥겨울까요. 단지 내 주변에 교사가 너무 많을 뿐이지요. 이것만이 글이고 춤이라고 속박하는 가르침들. 저는 아직 집 안에 갇혀 있습니다. 집 밖으로 길나서기 두렵습니다. 계속 주저하는데 마음은 점점 동요를 일으키네요.

아무래도 '슈유+너머' 사무실에 나타났다는 노숙자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집에서 쫓겨나거나 집을 떠남으로써 길 위에 있는 사람들. 자신이 길맹이라서 가던 길도 항시 낯설게 가는 사람들. 그들만이 세상의 모든 길을 걸어 가보는 자유를 누리겠지요. 아니, 있으리라 여겨져 본 적이 없는 길을 열고 새로운 곳으로 들어서겠지요.

저는 지금도 저에게 허락된 우발적 길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릅니다. 덕분에 책을 통해 '수유+너머'를 흠모하는지도 모르지요. 하나 ‘여기 적힌 사실들을 모두 믿지 마시라’는 지은이의 경고는 꼭 새겨둬야 할 것 같네요. 길 밖에서 들여다본 길의 풍경은 길에 들어선 다음에는 소용이 없지요. 풍경이란 필시 당신을 끌어들이기 위해 현현한 자신의 투사일 겁니다. 길은 오직 자기 몸으로 밀고 나갈 때 열리는 미지의 세계니까요.

"내가 서울대학 출신이 아니고, 사회과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 든 여자라는 사실이 유리하게 작용한 것 같아요."

지은이가 '수유+너머'의 운영 비법에 대해 들려주는 대답입니다. 저는 이 말을 굳게 믿고 싶네요. 서울대학의 길, 사회과학의 길, 젊은이의 길, 남성의 길 너머에서 찾아낸 오솔길이 그 모든 대로를 아우르는 네트워크가 된다니 말입니다.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고미숙 지음,
휴머니스트, 2004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4. 4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5. 5 6개 읍면 관통 345kV 송전선로, 근데 주민들은 모른다 6개 읍면 관통 345kV 송전선로, 근데 주민들은 모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