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려 사는 인생의 맛을 아는 50대는 멋지다?

노년의 입구인 중년 들여다보기(5) 영화〈콜리야〉

등록 2004.03.24 17:10수정 2004.03.24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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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 있는 50대 남자들을 한 번 떠올려 본다. 가깝게는 오빠가 50세, 형부가 52세, 지난 2월 사촌 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덜컥 혼자 남게 된 사촌 형부가 55세, 역시 올해 1월 오랜 투병 끝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 홀로 되신 가까운 선생님이 59세이시다.

그들의 얼굴과 모습을 한 번 떠올려본다. 윤기 있는 얼굴보다는 꺼칠한 얼굴이 먼저 다가드는 것을 보면, 비록 먹고살 걱정이 없다해도 그들이 겪고 있을 마음자리의 어려움을 넉넉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겉모습으로 따지자면 몸이 마른 편이든 뚱뚱한 편이든 허리 부분에는 두리두리한 나잇살이 붙어있고, 혈압이면 혈압, 간이면 간처럼 몸의 취약한 구석을 이미 다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건강 관리라든가 운동에 나름대로 신경들을 쓰고 있는 눈치이다.

자기 사업을 하는 오빠와 형부는 남 보기에는 그런 대로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알게 모르게 헉헉댈 때도 많은 것 같다. 워낙 몸이 좋지 않아 일을 쉬고 있는 사촌 형부는 아내를 갑자기 잃은 데다가 책임져야 할 두 아이 걱정에 영 편치 않아 보인다.

탄탄한 직장에, 알뜰한 노후준비를 해오신 선생님은 겉으로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어 보이신다. 그래도 세상 떠난 아내에, 아직 대학생인 두 아들에… 마음 속 어려움의 골이 왜 깊지 않겠는가. 동생 뻘 되는 내게 그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으실 뿐이리라.

남편 나이 마흔 넷. 막연하지만 10년 후를 그려본다. 흰머리가 많이 늘어나겠고, 허리는 아무래도 더 굵어지지 싶다. 거기다가 아이들은 스물 셋, 스물 둘. 잘 하면 대학생이거나 직장인이겠고, 혹시 결혼한다고 나서지는 않을까. 남편의 직장 생활이야말로 하루 앞이 짙은 안개 속이니 솔직히 그림조차 그릴 수 없다.

1988년 체코 프라하. 영화〈콜리야〉의 주인공 루카는 55세로 교향악단에서 밀려난 첼리스트이다. 다들 알아주는 실력이지만, 체코와 구 소련의 관계 속에서 반골 기질이 드러나 그리 된 것 같다. 지금은 동료들과 장례식에서 연주를 하면서, 묘비명의 지워진 글자들을 새로 칠하는 일로 근근히 생활하고 있다.

음악과 가정은 양립할 수 없다고 가르치신 부모님의 영향인지, 루카는 독신이며 자유 연애주의자. 애인이 끊일 새가 없다. 어느 날, 친구가 영주권이 필요한 소련 여자와의 계약 결혼을 주선하는데, 빚도 갚아야 하고 차도 사야 하는 루카는 고민 끝에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무거운 첼로를 싣고 다닐 차도 사고, 빚도 갚고, 한숨 돌릴 만하니 사고가 발생한다. 계약 결혼을 한 여자가 다섯 살짜리 아들을 놔두고 독일로 망명을 한 것이다. 아이를 맡아줄 유일한 사람이었던 아이의 이모할머니도 병이 나는 바람에, 아이는 법적 아버지인 루카 차지가 된다.

쉰 다섯 독신주의자 루카 앞에 온 다섯 살 콜리야. 두 사람의 동거가 시작된다. 울고 코 흘리는 이 어린아이가 귀찮기만 한 루카, 그래도 위장 결혼으로 걸리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된다.

흐느끼며 우는 어깨에 손을 대면 뿌리치는 아이,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건널 때 손을 내밀어도 잡지 않는 아이. 그래도 시간이 흐르고, 같이 차를 타고 놀러 가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캠핑도 가고, 만화영화도 같이 보고,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손을 내밀어 그 큰손을 잡고, 잠자리에서 깜빡 잊었다는 듯 "아빠, 잘 자!"하며 뽀뽀를 한다.

사회보장을 담당하는 정부 부서에서 아이를 데리러 오자, 루카는 도저히 아이를 기르지 못하겠다고 민원을 넣었던 것을 후회하며 콜리야를 데리고 도망친다. 그러는 사이에 나라간의 정세가 변하고, 서독에서 콜리야의 엄마가 콜리야를 데리러 온다….

자유 연애를 즐기며 독신으로 살던 쉰 다섯 남자에게 다섯 살 난 아이란 얼마나 귀찮고 낯선 존재인지 모른다. 어딜 가나 데리고 다녀야 하고, 자신의 은밀한 시간을 즐길 수도 없다. 거기다가 고집은 또 얼마나 센지 한 번 울면서 버티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외로운 두 사람은 아주 섬세하게 감정을 나누기 시작한다. 목욕을 하던 콜리야가 빈 샤워기를 귀에 대고 이모할머니와 통화를 한다. 할머니가 세상 떠난 것을 모르는 콜리야는, '그만 자고 일어나세요. 할머니 보고싶어요' 울음 섞어 이야기한다. 목욕탕 커튼 사이로 이 모습을 보는 루카의 눈가에 번지는 눈물.

아이가 잠 못 이룰 때 러시아어 선생인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동화책을 읽어주게 하던 루카가 어느 날 직접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열이 펄펄 나는 아이 간호에 밤을 새우기도 한다. 혼자이던 루카는 이렇게 조금씩 같이 사는 법을 배워나간다.

콜리야가 엄마를 따라 떠나고 난 빈자리에 루카는 또 다시 혼자 남는다. 그러나 나는 콜리야를 만나기 전의 루카와 콜리야를 만난 이후의 루카는 같지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만남은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프라하의 고풍스러운 풍경에 더해져 혼자 사는 남자의 자유로움과 은근한 쓸쓸함도 멋지지만, 아이와 함께 꾸려나가는 소소한 일상도 역시 아름답다. 사람이 사람을 겪음으로써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일은 나이의 많고 적음과는 관계없는 것 같다.

내 주변의 50대 남자들은 자유로움보다는 일상에 파묻혀 있는 쪽이어서 분위기 있고 멋진 풍경을 연출해 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좋은 것은 일상을 저버리지 않고 기꺼움으로 끌어안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루카가 쉰 다섯에 알게 된 어울려 사는 인생의 맛을 그들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어서 정말 충분히 멋있는 중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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