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여 기다려다오! 내가 간다"

[네팔 여행기 1]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트레킹

등록 2004.04.02 17:38수정 2005.02.1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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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 기자는 지난 2월말부터 보름간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했습니다. 에베레스트 산행기는 6회 정도 연재될 예정입니다. - 편집자주>

루클라에서 팍딩 가는 길. 눈 쌓인 쿰비율라 산이 보인다.
루클라에서 팍딩 가는 길. 눈 쌓인 쿰비율라 산이 보인다.김남희

트레킹 첫째 날


날씨 : 안개 낀 후 갬
걸은 구간 : 루클라(Lukla 2804m)-팍딩(Phakding 2623m)
소요 시간 : 3시간


새벽 5시. 수영언니가 깨운다. 지난 밤 전기요를 빌려 몸을 따뜻이 하고 잔 덕인지, 감기 기운이 한결 가라앉았다.

드디어 오늘은 에베레스트산이 있는 솔루 쿰부 히말(Solu Khumbu) 지역으로 트레킹을 떠나는 날이다. 이번 트레킹의 동반자는 한국에서 날아온 수영 언니와 정 선배님. 수영언니는 지난 2000년 지리산 종주를 할 때 만난 이후 인연을 이어오고 있고, 정 선배님 역시 그때 만난 일행인 혜정 언니의 오랜 지인으로 한국에서부터 안면이 있던 터다.

원래 내 계획은 시간은 많고 돈은 부족한 여건에 힘입어 이곳 카트만두에서 지리까지 버스를 타고 가 지리에서부터 트레킹을 시작하는 거였다. 하지만 한 달 일정으로 나온 두 사람의 시간과 체력을 아끼기 위해 루클라까지 비행기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늘어난 비용으로 인해 얄팍한 주머니가 좀 걱정이 되긴 하지만, 어쨌든 오늘 나는 에베레스트로 간다.


짐을 지고 가는 일꾼들. 루클라에서 남체까지 이들이 지고 가는 등짐의 가격은 무게 1kg당 12루피(200원)에 불과하다.
짐을 지고 가는 일꾼들. 루클라에서 남체까지 이들이 지고 가는 등짐의 가격은 무게 1kg당 12루피(200원)에 불과하다.김남희
에베레스트. 티벳명으로는 초모 랑마, 네팔명으로는 사갈마트.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 산을 알게 된 이후 늘 내 가슴 한켠에 살아 숨쉬고 있는 이름.

세계적인 등반가 조지 맬러리나 라인홀트 매스너의 글을 읽을 때면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얼마나 여러 번 책을 덮어야만 했던가.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창가에 서서 유치하게도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나를 본다.


“에베레스트여, 기다려다오. 내가 간다.”

시골 간이역 같은 공항 터미널에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지금. 올케가 보내온 한강의 ‘여수의 사랑’을 읽고 있지만 마음은 저 혼자 달음박질쳐 눈 덮인 산 속을 헤매고 있다.

아침 7시 이륙 예정이던 비행기는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려 11시에나 이륙한다. 비행기는 18인승이나 될까. 지금껏 내가 타 본 가장 작은 비행기다. 승객은 정 선배님과 수영언니, 나 그리고 가이드 람, 이렇게 넷. 앞쪽에는 의자를 접고 짐을 가득 실었고, 뒤쪽에 우리 넷이 앉았다.

자리에 앉으니 승무원이 사탕과 솜뭉치를 가득 담은 쟁반을 내민다.

“웬 솜?”

“소리 때문에 귀 아픈 사람들 귀 막으라고.”

과연 비행기는 굉음을 내며 날아오른다.

비행기 왼쪽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경이롭다. 끝없이 늘어선 설산들과 구름, 그 아래 까마득한 사람의 마을. 경치에 감탄하는 사이 어느새 30분만에 비행기는 루클라 공항에 착륙한다.

가이드 람이 이끄는 대로 ‘에코-파라다이스 식당’으로 이동, 야채카레와 레몬차로 점심을 먹는다.

오후 1시. 이제 트레킹의 시작이다. 루클라에서 구한 두 명의 포터 기얀드라와 바뜨라에게 배낭을 나눠 지게 하고 우리는 작은 배낭 하나씩을 메고 걷는다. 그래도 내 가방에는 카메라가방이 따로 들어있어 꽤 무겁다.

눈 앞으로는 해발고도 6783m의 깡대(Kang Tega)산이 보이고, 어디선가 야크 방울소리가 들려온다.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상쾌하다.

눈 덮인 산들을 바라보며 걷자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왜 이렇게 산만 보면 가슴이 뛰는 걸까. 아직은 이성에 가슴이 두근거릴 나이인 것 같은데 잘 생긴 나무 한 그루, 우뚝 솟은 봉우리에만 가슴이 뛰니 이것도 병인가.

어떤 작가가 그랬다지. 자신의 인생은 산을 알기 전과 산을 안 이후로 나뉜다고. 나 역시 나이 서른에 산을 만난 이후 많이도 변했다. 사람의 마음에 지나치게 의지해 스스로를 버겁게 만들던 욕심도 좀 줄고, 침묵과 겸손의 미덕도 조금은 배웠으니. 산과 자연은 내게 사람들이 가르쳐주지 못한 것을 말없이 깨우쳐 준 큰 스승인 셈이다.

짐을 실은 좁교(야크와 소의 교배종)떼를 끌고 흔들다리를 건너가는 사람.
짐을 실은 좁교(야크와 소의 교배종)떼를 끌고 흔들다리를 건너가는 사람.김남희
며칠 전 사흘간 연이어 내린 폭설로 인해 아직 산등성이는 눈에 덮여 있다. 오르락내리락하며 길은 이어지지만 기본적으로는 고도가 더 낮은 팍딩으로 향하고 있어 내려가는 셈이다.

오후 4시, 루클라를 떠난 지 세 시간 만에 팍딩에 도착한다. 셀파 빌리지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서니 2인실 방값은 100루피(한화 1700원). 방에는 작은 나무 침상 두 개만 놓여 있을 뿐이다.

짐을 풀고 식당으로 내려가 저녁을 먹는다. 언니와 나는 고산 트레킹을 하는 동안 저녁은 간단히 먹기로 했기에 감자 스프만을 주문한다.

저녁을 먹고 나니 7시. 할 일이 없다. 식당 난로가에 둘러앉아 가지고 온 책을 읽다가 난로가 꺼질 무렵 방으로 돌아간다. 세수를 하려고 세면대의 물을 트니 물이 얼음장처럼 차다. 손가락이 끊어질 것 같다. 서둘러 고양이 세수를 하고 방으로 들어와 담요 하나 더 덮고, 침낭 속에 들어간다.

삼면으로 창이 난 방은 몹시 춥다. 유난히도 심하게 추위를 타는 나이기에 가장 두꺼운 원정용 침낭을 가져왔지만 그래도 불안하다. 카트만두에서 만난 영진 언니가 알려준 대로 물통 속에 뜨거운 물을 담고 발 밑에 두니 곧 발이 따뜻해진다. 이렇게 따뜻하게 잠들 수 있다니 뜻밖의 호강이다.

트레킹 둘째 날

날씨 : 찌뿌둥하다가 잠시 햇살
걸은 구간 : 팍딩(Phakding 2623m)-남체(Namche Bazaar 3440m)
소요 시간 : 5시간
복장 및 위생 상태 : 양호


깡대(Kang Tega-6783m)산의 자락에 둘러싸인 남체바자 마을의 모습.
깡대(Kang Tega-6783m)산의 자락에 둘러싸인 남체바자 마을의 모습.김남희
눈을 뜨니 7시. 어제 저녁 8시부터 오늘 아침 7시까지 꼬박 11시간을 잤다. 오믈렛으로 아침을 먹고 8시 40분 출발.

출발 직전 “죄송합니다. 긴급상황입니다"를 외치고 수영 언니와 난 화장실로 달려간다. 정 선배님은 그런 우리에게 “니들은 아무데서나 볼일도 잘 보네. 혜정이는 자연을 지극히 사랑해서 몸 속의 노폐물을 다 제 집으로 가져가서 처리하던데라며 농담을 하신다. 아, 현지 적응 능력이 남다르게 뛰어난 것도 이렇게 놀림감이 되고 만다.

길은 소나무와 잣나무가 듬성한 바위산이다. 작년 이맘 때 트레킹을 했던 중국 운남성 여강의 호도협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때는 2박 3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이번에는 15박 16일의 제법 긴 일정이라 트레킹에 임하는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길 좌우로는 돌집과 그 집을 둘러싼 키 낮은 돌담들이 이어진다. 제주도 같기도 하고, 영국의 호수 지방(Lake District) 같기도 하다. 40여분쯤 걸으니 눈 덮인 바위산 탐셸꾸(Thamserku Central. 6618m)가 정면 오른쪽으로 따라온다.

벤카(Benkar) 마을의 벤카 게스트 하우스에서 잠시 휴식. 오른쪽으로는 깡대(Kang Tage East)가 우뚝 솟아있다.

10시 40분. 몬주(Monju. 2850m)에 도착. 이곳에서 사갈마트(에베레스트의 네팔 이름) 국립공원 입장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허가서 비용은 1000루피(한화 17000원). 여권과 돈을 내고 서류에 사인을 하니 바로 허가서를 내준다.

국립공원 사무소를 지나자마자 정면에 멋진 바위산 쿰비율라(Kumbi Yul Lha)가 보인다. 20분쯤 더 걸으니 조살레(Jorsale) 마을. 시간은 갓 11시를 넘겼을 뿐이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점심을 먹는다.

계란 볶음밥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시간은 정오를 넘겼다. 이제 길은 가파르게 올라간다.

철다리를 건너 라자도반(Larja Dobhan) 마을을 지나니 정면 오른쪽으로 쿠슘 캉구루(Kusum Kanguru 6370m)가, 왼쪽으로는 탐셀꾸가 보인다. 숨을 헉헉거리는 우리를 보며 포터 기얀드라와 바뜨라가 “비스따리! 비스따리!(네팔어로 천천히)”를 외친다.

길은 군데군데 녹다 만 얼음과 눈으로 질척거리고 미끄럽다. 계속되는 오르막. 가끔씩 햇살이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제법 숨이 차 오른다.

에베레스트 뷰 호텔에서 내려오는 길에 바라보는 깡대 전경.
에베레스트 뷰 호텔에서 내려오는 길에 바라보는 깡대 전경.김남희
두 시간 남짓 걸으니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지점이 나온다. 왼쪽 정면으로는 깡대, 오른쪽으로는 쿰비율라가 솟아 있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덮여 있다지만 가장 높은 산이 2000m를 넘지 않는 나라에서 온 나는 주변 산세가 경이롭기만 하다. 눈 들면 마주 보이는 산마다 이름이 알고 싶고, 높이가 궁금해, 자꾸 물어보고 또 확인하곤 한다.

2시 50분, 드디어 남체 바자(Namche Bazzar) 도착. 깡대와 탐셸꾸의 품에 안긴 남체 바자는 한 눈에 보기에도 규모가 제법 큰 마을이다. 람이 데리고 간 타쉬델레 게스트 하우스는 마을의 거의 꼭대기에 위치해 전망이 그만이다.

이곳이 “Hot Shower"가 가능한 마지막 지점이라 가격을 물으니 지금은 겨울이라 양동이 샤워만 가능한데 한 양동이에 150루피란다. 깎아 달라고 조르니 70루피까지 가격이 내려간다.

그런 나를 보고 계시던 정 선배님이 “싸구려와 경제적인 건 다르다”며 가격 깎는 걸 나무라신다. 게다가 고도적응을 위해 이곳에서 반드시 이틀을 머물겠다며 가이드에게 못을 박으신다. 아무리 정 선배님이 우리보다 훨씬 연장자라 해도 함께 여행하는 처지에 일방적으로 일정을 결정하니 기분이 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분이 상하기는 수영언니도 마찬가지인데 언니는 여전히 싹싹하게 정 선배님을 대하면서 감정을 쉽게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커 페이스’가 되지 못하는 나는 “현재 무지하게 기분 상했음”이라는 표딱지를 이마에 확실히 박아놓은 데다가, 선배님 말씀에 대답도 잘 안 하면서 퉁명스레 굴고 있는데…. 사람이 같은 일을 겪어도 내공의 힘에 따라 풀어 가는 수준이 다름을 여기서 다시 깨닫는다.

방으로 돌아와 어제처럼 뜨거운 물을 넣은 물통을 발 밑에 굴리면서 잠자리에 든다. 아직까지 춥지는 않다.

야크떼를 몰고 고갯길을 넘고 있는 남자. 남체에서 팅보체 가는 길. 뒤로 눈 덮인 봉우리는 아마 다블람.
야크떼를 몰고 고갯길을 넘고 있는 남자. 남체에서 팅보체 가는 길. 뒤로 눈 덮인 봉우리는 아마 다블람.김남희
트레킹 셋째 날

날씨 : 쨍하고 해 뜬 날
걸은 구간 : 남체 바자 - 에베레스트 뷰 호텔(Everst View Hotel 3859m)-남체 바자
소요 시간 : 2시간
복장 및 위생 상태 : 몹시 양호(더 이상 깨끗할 수는 없는 상태)


7시 좀 넘어 기상. 창의 커튼을 걷으니 햇살을 받은 산 깡대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일단 트레킹을 시작하면 평균 수면시간이 12시간으로 늘어난다는 경험자들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 우리도 거의 하루의 절반을 침낭 성능을 실험하며 보내고 있으니.

오늘 아침식사로는 프렌치토스트를 주문했는데 계란을 얼마나 살짝 입혔는지 그 수준이 경이롭다. 내 옆에서 식사를 하고 계시는 주인 할머니의 프렌치 토스트는 계란 두께로 인해 식빵이 부러질까봐 불안할 지경인데….

아침을 먹고 에베레스트 뷰 호텔로 출발. 3400m인 이곳 남체에서 400m를 더 올라가 고도 적응을 하면서 에베레스트도 조망하는 게 오늘 우리의 목표다. 길은 가파른 데다 아직 녹지 않은 눈으로 질척거린다.

한 시간 남짓 헉헉거리며 가파른 고개를 올라서니 파노라마 호텔이 나온다. 왼쪽 편에 꽝대, 정면으로는 쿰비율라, 오른쪽으로는 탐셀꾸가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다. 절벽으로 난 좁은 길을 10여분쯤 걸어가니 ‘에베레스트 뷰 호텔’이다.

싱글 175불, 더블 250불이라는 일본인이 세운 5성급 숙소. 이곳에 오는 손님들은 대부분 일본인인데 단체로 헬기를 타고 도착한다고 한다. 이런 산 속에 굳이 5성급 숙소를 지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5성급 숙소답지 않게 시설은 영 허름한데 노천 카페의 전망 하나는 정말 특급이다. 맨 왼쪽으로 따우체(Tawoche. 6542m)가 보이고, 정면으로 눕체(Nuptse. 7864m), 그리고 에베레스트, 그 오른쪽으로는 로체(Lhotse 8501m)가 보이는 전망이다.

오늘 에베레스트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는 거대한 봉우리들만으로 이미 한숨이 나온다.

황동규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번 들어가면 마음의 눈이 멀어야 나온다는 / 슬픔도 소리 없이 언다는 설산’, 바로 그 설산들이다.

컁쥬마 마을의 ‘아마다블람 롯지’ 식당에서 차를 마시며 쉬고 있는 트레커들. 남체에서 팅보체 가는 길.
컁쥬마 마을의 ‘아마다블람 롯지’ 식당에서 차를 마시며 쉬고 있는 트레커들. 남체에서 팅보체 가는 길.김남희
카페에는 나이가 지긋한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물만 잔뜩 탄 레몬 스쿼시 한 잔을 마시고 하산. 미끄러운 길에 쥐약인 나는 온 몸을 바싹 긴장한 채 내려오는 데도 결국 심하게 넘어지고 만다. 메고 있던 카메라까지 진흙탕에 처박고.

숙소로 돌아오니 12시. 진흙탕에 넘어져 엉망이 된 바지를 빨겠다고 찬물을 받는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빨래를 하고 헹군다.

“앗, 차가워. 으…. 손가락 떨어지겠네.” 비명을 내지르며 손을 호호 불면서 빨래를 헹구는 내 모습을 본 기얀드라가 자기가 헹궈주겠다며 나선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바지와 양말, 장갑을 예쁘게 널고 나니 기분이 상쾌하다.

남체 바자는 우리가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장소이다. 수세식 변기와 뜨거운 물이 나오는 세면장, 심지어는 인터넷까지. 물론 인터넷 요금은 30분에 450루피(한화 7600원)라는 기록적인 수준이지만.

우리는 문명의 마지막 혜택을 누리기 위해 오늘 샤워를 하기로 했다. 한 양동이 가득 담아온 뜨거운 물을 들고 샤워장으로 들어선다. 실망스럽게도 양동이 안의 물은 찬물을 섞어야 할 정도로 뜨겁지는 않다.

‘이걸로 어떻게 씻지‘ 걱정했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양동이 하나 분량의 물로 머리 감고, 몸 씻고, 헹군 물에 속옷까지 빤다. 평소 내가 얼마나 물을 헤프게 쓰는지 보이는 순간이다.

4시가 되니 어느새 몰려든 안개가 순식간에 산을 감추고, 기온이 뚝 떨어진다. 식당에 장작불이 지펴지는 시간이다. 소똥과 나무를 태우는 난로 옆에 다들 모여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고심하며 차림표를 훑어본다. 덜 마른 빨래를 난로 옆 의자에 걸어 놓고 ‘간디 자서전’을 읽으며 저녁을 기다린다.

오늘 저녁은 언니가 한국에서 들고 온 신라면이다. 여행 다니는 내내 ‘먹고 싶은 음식’하면 신라면이 먼저 떠오를 정도로 나는 매운 라면을 좋아한다. 언니가 네팔에 오기 전에 주고받은 편지에서 “뭐 필요한 거 없니?” 물을 때마다 “언니, 라면이나 많이 사와”답을 하곤 했다.

그래서 언니가 들고 온 라면 10개는 이번 트레킹 중 우리의 가장 중요한 식량이다. 부엌 사용료 100루피를 내고 언니가 직접 끓여온 라면은 정말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상투적 표현의 극치지만 이만한 표현도 드물다)’ 바로 그 맛이다.

행복한 포만감으로 배를 문지르며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를 준비한다. 아까 미끄러질 때 삐끗했는지 허리가 쑤셔 방콕에서 얻은 찜질 팩을 붙이고 잠자리에 든다.

팅보체 마을에서 바라보는 아마 다블람 전경.
팅보체 마을에서 바라보는 아마 다블람 전경.김남희
트레킹 넷째 날

날씨 : 흐린 하늘에 비듬처럼 성긴 눈발 잠시 날리다.
걸은 구간 : 남체 바자(Namche Bazaar 3440m)-팅보체(Tengboche 4252m)
소요 시간 : 4시간 20분
복장 및 위생 상태 : 양호


눈을 뜨니 7시. 따뜻하게 잘 잤다. 찜질팩이 기대 이상으로 열을 내 준 덕에 지난 밤 내내 등허리가 뜨끈뜨끈했다. 나도 이제 구들장에 허리를 지지고 다녀야 할만큼 나이가 들었나 보다.

식당으로 내려와 차림표를 훑어본다. 밥 먹을 때마다 고민은 시작된다. 어느 곳을 가던지 완전히 통일된 식단. 인종 통합, 계급 통합(네팔에도 카스트 제도가 존재한다)은 하나도 못 하면서 어쩌면 이렇게 식단 통일은 완벽하게 해 놓았는지….

안나푸르나는 어디서나 애플파이를 팔아서 ‘애플파이 트레일’이라 불린다더니, 에베레스트 지역 역시 어디를 가나 똑같은 식단이 보급되어 있다. 다만 해발고도가 올라감에 따라 가격도 덩달아 올라간다는 점만 다르다. 양파를 넣은 오믈렛으로 식사를 마치고, 난로가에 모여 앉아 잠시 휴식.

9시 15분, 출발이다. 산허리를 치고 도는 좁은 고갯길이다. 오른쪽 정면으로는 아마 다블람(Ama Dablam 6814m), 뒤로는 깡대, 왼쪽으로는 따우체가 보인다. 가끔씩 짐을 실은 야크떼를 끌고 가는 사람들과 만난다.

11시 15분. 로사샤 마을에서 아이들이 푸대로 만든 썰매를 타며 놀고 있다. 우리도 빌려 타고 비탈을 내려왔다.

11시 45분. 푼키 드렌카(Phunki Drenka) 마을 도착. 여기까지는 비교적 평지거나 내리막이었다. 이제 해발고도 3250m인 이 마을에서 해발고도 3867m인 팅보체(Tengboche)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으며 숨을 고른다. 점심은 찐 감자와 야채 스프. 장작을 때는 화덕 하나로 아줌마 혼자 요리한 탓에 음식은 잊을 만하면 하나씩 나온다. 주문하고 한 시간 이십 분을 기다려 십 분 만에 식사를 끝냈다.

식당에서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는 호주인들과 포터들.
식당에서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는 호주인들과 포터들.김남희
1시 25분 출발. 눈이 녹지 않은 고갯길이다. 구름이 몰려오고 날이 흐려진다. 눈발이 아주 약하게 흩날린다.

3시 15분. 팅보체 도착. 아주 작은 마을이다. 마을의 중심에 위치한 큰 사원과 그 주변으로 너댓 채의 집이 전부. 이름 하나는 거창한 ‘히말라얀 뷰 롯지(Himalayan View Lodge)’에 짐을 풀다.

7명의 호주 단체 관광객과 2명의 서양인, 우리 셋까지 이 좁은 식당이 가득 찼다. 오믈렛과 버섯 스프로 저녁을 먹고 난로가에서 책을 읽고 있지만 집중이 되지 않는다. 호주인들이 음악을 틀어놓고, 먹고, 마시고, 춤추느라 소란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영어가 내 모국어가 아니라 그 모든 말들이 귀에 쏙쏙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랄까.

호주 아이들이 ‘무스탕 커피’라는 네팔 위스키를 주문하더니 마셔보라며 건네준다. 냄새만 맡아도 역겨울 정도로 독해 바로 옆으로 넘긴다. 잠시 후 술이 취한 호주 아이들은 우르르 바깥으로 몰려가더니 남녀 할 것 없이 바지 엉덩이를 내리고 팬티 바람으로 사진을 찍는다.

떠들썩하게 몰려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분홍색 팬티 주인 누구야? 난 다 봤어”라고 소리쳤더니 누군가 망설임도 없이 ”그건 나야“라고 대답한다. “야, 오지들이 이렇게 잘 노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어”라고 하니 누군가 “원래 혼자서는 얌전한데 모이기만 하면 이래”라며 웃는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디지털 카메라 건전지가 빠르게 닳고 있다. 충전을 해야 하는데 내 충전기 잭이 맞지 않아 호주 애들에게 “투-핀 플러그 있는 사람?” 물으니 한 청년이 자기 것을 빌려준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하지?” 물으니 “너 혹시 딸 있어?” 되묻는다. 잘못 들었나 싶어 “뭐라고?” 하니 “아니, 농담이야” 하며 웃는다.

그제야 농담의 전모를 파악한 나. 뭐, 딸이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고? 내가 그만한 나이의 딸을 가진 아줌마로 보일 정도로 나이가 들었다는 거야? 결국 다 쓴 플러그를 돌려주며 복수의 화살을 날린다.

“이 다음에 혹시 내가 딸을 갖게 되면 너한테 꼭 연락할게. 단, 널 위해서가 아니고 네 손자를 위해서야”라고. 옆에서 듣던 다른 친구들이 박수와 휘파람으로 나의 복수를 인정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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