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산대놀이 34

애향이

등록 2004.04.20 17:21수정 2004.04.20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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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위길은 예기치 못한 일에 크게 놀라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옆에 있던 앞이마에 혹이 불거져 나온 한량이 백위길을 보더니 그 표정이 우스운지 낄낄거리다가 자기도 망건을 쑥 벗어 보였고 그 역시 맨머리나 다름없을 정도의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옆에 앉은 애향이를 비롯한 기생들도 이 모양새를 보고서는 크게 놀라 얼굴빛이 하얗게 질릴 지경이었다.

"점잖으신 양반네들이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들이오!"


옴 한량, 아니 바로 옴 땡추는 백위길에게 앉을 것을 권하며 술잔을 내밀었다.

"양반은 맞는데 그리 점잖은 사람들이 못 되니 이러는 게 아닌가? 자네는 포교로서는 신출내기라 들었는데 포도청 생활은 할 만한가?"

백위길은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허허허… 그렇지 그래… 여기서 자신이 어떻다 저떻다 말하기는 어렵겠지… 하지만 이포교란 자가 자네에게 모질게 대한다는 건 이미 알고있으며 포도청에서 그리 환대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 정도도 짐작하네."

백위길은 포도청 사람들이나 알 법한 이야기를 내뱉는 옴 한량의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으며 한편으로 이 자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다.


"허나 앞으로 우리 뜻에 잘 따르면 포도청 생활이 편해질 테니 하나 하나씩 얼굴을 잘 봐두게."

백위길이 처음 얼굴을 맞댄 옴 한량 외에도 혹 한량, 허여멀쑥한 한량, 키 작은 한량이 술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선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뜻에 잘 따른다 하심은…."

"그런 건 차차 알게 될 걸세. 자! 받게나."

옴 땡추는 소매에서 절그덕 거리는 옆전 꾸러미를 꺼내어 백위길 앞에 툭 던졌다. 한 눈에 보아도 상당한 돈이었지만 백위길은 선뜻 이를 주워들기가 힘들었다. 자신을 지켜보는 애향이를 비롯한 기생들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곡절 없이 돈을 받는 것은 시전거리에서 그렇게 자신이 비웃었던 썩은 포교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이들이 내게 돈을 주는 것은 뭔가 구린 속내가 있을지 모른다.'

백위길이 망설이며 돈을 집어들지 않자 옴 땡추는 엽전을 아예 백위길 쪽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이 돈을 집어드는 것으로서 포교로서의 양심을 버리라는 뜻은 아니네. 다만 우리의 뜻에 동조하겠다는 언약과 같은 것이네."

"대체 그 뜻이 무엇이옵니까?"

"별거 아닐세. 다른 이들에게 이 일을 발설하지 않으면 되고 앞으로는 그저 이렇게 우리와 술잔을 기울이며 얼굴만 익혀두면 되는 걸세."

"하오나…."

백위길이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혹 땡추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야 이놈아! 뭘 그리 이리저리 따지냐? 양반이 천한 이를 이렇게까지 대하면 '예 알겠사옵니다.'하고 냉큼 주워들고선 고분고분 말이나 들으면 된다는 걸 몰라?"

백위길은 혹 땡추의 강압적인 어투에 거부감이 인다는 듯 순간적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혹 땡추는 이를 묵과할 수 없다는 듯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드려 했고 옴 땡추는 크게 화를 내며 이를 막았다.

"이놈아! 지금 백포교와 내가 얘기중이지 않느냐!"

"형님! 그래도…."

"시끄럽다!"

혹 땡추는 품속에 넣었던 손을 쑥 빼고선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옆에 앉은 애향이의 허리를 감으며 소리쳤다.

"우리가 맘만 먹으면 네 놈 정도는 소리소문 없이 없애버릴 수도 있어! 조심해!"

혹 땡추는 큰 소리를 고래고래 치고선 애향이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려 하였다. 애향이의 표정이 더욱 찡그려 지며 거부의 뜻으로 혹 땡추를 밀었는데 그 정도가 너무 강했는지 아니면 술에 취한 탓인지 혹 땡추는 뒤로 벌렁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이를 본 이들은 방구들이 들썩이도록 크게 웃어 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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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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