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배럴은 이보다 적은 양일 겁니다. 예전에 어른들은 3명이서 번갈아가며 30리 길을 지게에 지고 왔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김규환
빈한한 집에서 태어나 어떻게든 쓰러진 집안을 일으켜 세워 어른들 호강시키고 형제자매들 잘 살게 해보겠다는 의지가 충만하던 그 시절 나는 밤마다 기도를 드렸다. "제발 우리 마당에서 석유가 콸콸 쏟아지게 해주세요" 하며 7년 넘게 깨어있을 때면 간절히 기원했다. 나는 애국자로서 자격을 충분히 갖춘 셈이었다.
88평 밖에 안 되는 옛 집터에 석유가 나오면 정말이지 우린 한국에서 제일 부자가 될 것이며 그러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되어 서울 부자 동네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어렸을 때부터 난 집을 팔고 서울로 뜰 생각을 했다.
나는 특히 비가 오는 날엔 더 소망을 구체화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윗집 발동기에서 몇 방울 떨어져 비를 타고 흘러내렸을 기름띠가 무지갯빛을 띠고 마당 한구석에서 쏙쏙 솟아올라 물기가 자작자작 고여 있는 곳에 쫘악 퍼져 가면 날아갈 듯 기뻤다. 밖으로 나가 자랑할 수도 없었다. 최초 발견자가 되어 돈벼락을 맞고 싶었다.
"엄마! 엄마!"
"왜 뭔 일 났냐?"
"고거시 아니고라우. 울 마당에서 *시구 난당께요."
"그려."
그래도 어머니는 기쁜 표정을 짓지 않으셨다.
"엄마 근디 *호맹이 어딨소?"
"저기 행랑채 *칙간에 가봐라. 위에 걸려 있을 것이여."
부엌을 뛰쳐나와 변소로 갔다. 호미를 들고 쏙쏙 모래 알갱이들이 춤을 추는 토방 밑 흙을 파기 시작했다. 물은 계속 솟아올랐다. 처음엔 석유가 나오는 맥을 놓치지 않게 구멍을 작게 파 나갔다. 여전히 기름띠는 사라지지 않고 햇볕을 받아 더 선명해졌다.
'조금만 더 파 들어가면 돌 사이에서 기름이 콸콸 쏟아지겠지.'
나는 나무가지를 가운데에 꽂고 다음엔 괭이를 가져다가 주위를 넓혀갔다. 진 마당을 호미와 괭이로 헤집어 파니 끈적끈적한 죽이 되었다. 마당은 엉망진창이었고 난 흙투성이가 되었다.
'엉, 이때쯤 나와야 되는디….'
평소 집집마다 우물 파는 구경을 했던지라 마냥 힘들여 파다보면 나올 줄 알았는데… 내 기대는 물거품에 떠내려갔다. 물이 마르면 곧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 때마다 나는 아버지께 "누가 마당을 뒤집어 놓았냐?"는 핀잔을 들었다.
그렇게 나는 꿈을 팠다. 그 작업을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내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허망한 꿈은 비가 그치면 사라졌다. 신기루처럼. 그러나 이젠 고향 집 마당에 석유가 나오지 않아도 되니 제발 고향집을 다시 찾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저러나 나도 벌써 두 달째 출근 때만 차를 사용하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좀이 쑤셔 죽겠다. 연료첨가제라도 넣고 한번 떠나볼까. 고향 형님과 장모님께서는 언제 내려오느냐고 성화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