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산대놀이 53

세상을 바꾸는 것

등록 2004.05.24 17:43수정 2004.05.24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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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름을 박팔득이라고 밝힌 반촌사내는 감사함을 표하며 앞으로 도울 일이 있으면 아무 때나 자기를 찾아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거, 그럴 일은 없대도."


약간 귀찮아진 백위길이 강하게 거부하자 박팔득은 한 발자국 물러서며 공손히 말했다.

"반촌사람은 은원(恩怨)을 분명히 따집니다. 포교님은 비록 사소한 일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사오나 제게는 포도청으로 가 치도곤을 맞지도 모를 큰일이 아니었습니까?"

"허, 그래 자네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겠나? 내 다시 반촌에 들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푸줏간에서 제 이름을 대고 찾으시면 소인이 부리나케 달려가겠습니다."
"그러게."

돌아가는 박팔득을 보며 백위길은 포교 일을 맡은 후 모처럼 뿌듯함을 느꼈다. 포교들에게 끌려가던 싸전상인이 이 모양새를 보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백위길을 불렀다.

"왜 그러느냐?"
"제가 됫박을 속인 것은 참으로 죽을죄지만, 포교께서는 싸전을 돌며 더 큰 도적을 쫓고 있지 않았사옵니까? 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려 하니 주위를 잠시 물리쳐 주시고 이번 일은 못 본 채 해 주십시오."
"네 놈이 아직도 나와 흥정을 하려 듦이냐!"


싸전상인은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백위길을 바라보았다.

"쌀들은 호조로 갔사옵니다."
"뭐라?"


백위길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싸전 상인을 쳐다보았다.

"그러니 호조에 적당히 말만 흘리면 평생 놀고 먹을 돈을 받아내는 건 일도 아니란 얘기를…."

백위길은 싸전상인의 말을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네 이놈! 그런 말이라면 더욱 포도청에 가야 할 일이다!"
"아…. 이거 앞뒤가 꽉 막혀 말이 안 통하네… 서로 좋아라 말해주는 건데 왜 이러시오?"
"시끄럽다!"

벡위길은 싸전상인을 포도청으로 압송해간 후 이러저러한 사정을 종사관 한상원과 포장 박춘호에게 모두 고해 바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유들유들했던 싸전상인은 낯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정녕 그러하던 말이냐?"

한상원이 몇 번씩이나 물었음에도 싸전상인은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싸전상인을 옥에 가둔 후 박춘호는 백위길을 불러 공을 치하했다.

"잘했네. 그런데 같이 간 김포교는 어디로 간 겐가?"

백위길은 속으로 앗차 싶었지만 달리 그럴싸한 핑계를 댈 위인은 못 되었다.

"다른 일이 있어 가보았나이다."

"…그래?"

백위길은 박춘호의 굳은 인상을 보며 조심스레 물러선 후 퇴청하겠다고 말한 뒤 포도청을 나왔다. 백위길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었다.

'집이 참 엉망이겠군.'

집에 다다른 백위길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광경을 보고 놀람과 동시에 가슴이 설렜다. 바로 애향이가 집안 구석구석을 닦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인기척을 눈치챈 애향이는 백위길을 돌아보더니 생긋 웃어 보였다.

"먼길을 떠났다 하더니 이제야 오셨나이까?"

백위길은 매일 그리워하던 애향이를 본 순간 그저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그런데…내 집은 어찌 알고…."
"그야 다른 포교님들에게 물어보았지요. 시장하시겠습니다. 이제 밥을 지으려면 오래 걸릴 터인데…."
"아니 그럴 것까진 없소! 아, 아니 그저…."

정색을 하며 당황해 하는 백위길을 보며 애향이는 활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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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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