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봐요, 진작 가지..."

연극 속의 노년(10) <양덕원 이야기>

등록 2004.06.07 10:32수정 2004.06.07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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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한창 죽음 준비에 대해 배우고 있는데, 죽음 이야기만으로 내내 이어지는 강의 외에도 죽음 관련 책을 읽는 독서 모임에 참여해 공부를 하고 있다. 이런 나를 보면서 가까운 친구들은, 서두르지 않아도 다 알게 되는 노년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죽음까지냐며 딱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기도 한다.

죽음과 관련해 새로운 용어들도 많이 배우게 되는데, 지난주에는 "임종의 탄도(彈道: trajectory of dying / dying trajectory)"라는 말을 배웠다. 이 말은 정상적인 건강상태에서 임종의 상태로 접어드는 과정을 표현하게 위해 사용하는 용어이다.

지속 기간과 형태에 따라 '임종의 탄도'를 보통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데, 먼저 '질질 끄는 유형'이다. 실제로 죽는 것보다 훨씬 더 일찍 죽을 것으로 기대되는 환자들의 경우를 말한다. '단기적 집행유예 유형'은 기대하지 않았던 죽음의 연기 현상을 보이는 것이고, '급작스러운 놀라움 유형'은 회복되는 듯하다가 갑자기 죽는 환자이다.


또한 '집행유예 판결 유형'은 환자가 병원에서 집으로 보내지고 그 후 몇 해를 더 살게 되는 유형으로, 의사가 가망 없다고 해서 집으로 퇴원했는데 그 후에 몇 년 더 살았다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우리들도 심심찮게 듣게 된다. 마지막은 '입원-재입원 유형'으로 서서히 침몰하는 환자로서 여러 차례 병원에서 집으로, 다시 집에서 병원으로 옮겨다니게 된다.

연극〈양덕원 이야기〉속의 아버지는 '임종의 탄도'로 보자면 가장 첫 번째인, '질질 끄는 유형'에 속한다. 병원에서는 아버지가 세 시간이면 돌아가실 거라고 한다. 양덕원 고향집으로 달려온 삼남매. 그러나 꺼질 듯 위태롭던 아버지의 생명은 다시 소생하고, 이 일은 3개월 동안 반복된다. 위독하다고 해서 후손들이 모여들면 위기를 넘기고, 다시 또 위독해지고… 자손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이런 상황은 정말 더도 덜도 없는 우리들의 현실이다.

곧 돌아가실 것 같은 아버지 앞에서 그동안의 잘못을 눈물 콧물 섞어 뉘우치고 사과 드리다가도, 자식들은 걸려온 바이어의 전화를 받아야 하고 출근 걱정을 한다. 누이동생은 그런 오빠들을 비난하지만, 그도 역시 자신의 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깜박거리는 남편의 생명과 자식들의 처지 모두를 헤아리며 양쪽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가슴만 이래저래 오그라든다.

오빠 둘과 한 명의 누이동생은 어린 시절의 기억에 빠져들어 의기 투합했다가도, 서로에게 불만스러운 속내를 드러내며 심하게 말다툼을 하기도 한다. 사느라 바빠 서로의 생활을 전혀 모르기에 주고받는 안부는 무심하기도 하고 남보다 못하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관계는 바로 형제 자매 관계이다. 물론 부모와 자녀 관계도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지속되는 가장 긴 관계 중의 하나지만, 부모와 달리 형제 자매는 특히 공유하고 있는 과거의 기억이 풍성하고, 또 무엇보다 비슷한 연령대로 같이 늙어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애를 나누다가도 끊임없이 토닥거리게 되는 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갖기 드문 편안함과 너그러움을 서로에게 기대해서일 것이다. 고단한 생활 속에서 양덕원을 오고가야 하는 자식들은 언제부턴가 아버지의 임종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들을 보며 깜짝 놀란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도 현실은 그들의 발목을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시골집 마당에 놓인 평상 밑에는 고장난 선풍기에서부터 구식 다이얼 전화기, 플라스틱 소쿠리, 깡통, 빈 박스, 유리병 같은 허접 쓰레기가 가득 차있다. 그런 평상 위에 앉은 자식들의 모습이며 이야기를 마당 저 쪽에 서있는 나무가 말없이 다 보고 듣는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잡다한 고물들을 가린 채 자식들의 앉을 자리가 되어주는 평상이기도 하며, 그런 자식들의 하는 모양새를 말없이 보고 듣는 마당가 한 그루 나무이기도 하다. 위독할 때마다 달려오던 삼남매를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는 아내만 있을 때 세상을 떠난다. 마당가 마른 나무에 근조(謹弔)라고 적힌 등이 내 걸린다.

자식들이 왔다 갈 때면 어김없이 기름이며, 고구마를 챙겨주고, 떠나는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어머니가, 남편의 죽음을 혼자 겪고는 이제나저제나 자식들이 도착하기만을 애를 끓이며 기다리신다. 세상 떠난 남편에게 나쁜 기억일랑 다 잊고 좋은 것만 꽁꽁 싸 가지고 제일 좋은 데로 가라는 어머니는, 그러면서도 자식들 있을 때 떠나지 못한 남편을 향해 안타까운 소리를 한다. "거 봐요, 진작에 가지…."

그러나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이제 아버지의 사십구재가 끝나고 다시 자식들은 자기들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날, 아버지 떠난 빈집에는 어머니와 똥개 '도꾸'만 남는다. 떠나며 뒤를 돌아보는 자식들과 그런 자식들을 배웅하는 어머니, 우리들의 삶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며 결국 그리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부모는 늘 주며, 자식은 어김없이 돌아간다.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싸고 가족의 이야기, 부모 자식의 이야기를 하는 연극으로 아기자기하고 재미있어서 객석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망설임 없이 '노년 연극'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좋은 연극에서 내가 섭섭했던 것은 노년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점이었다.

입장료가 일반 2만원, 대학생 1만5천원, 청소년 1만원이었는데, 매표소든 안내하는 직원이든 65세 이상 어르신의 경로우대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대책도 없었다. 아무리 입장료를 할인해 드린다 해도 어르신들이 연극 공연장을 찾기란 그렇게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내가 경로우대를 원하는 것은 어쩜 그것이 지닌 상징적인 의미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사자들은 돈을 내고 저녁 시간에 극장을 찾을 수 없다손 쳐도, 연극을 보는 다른 세대에게 '그래, 맞아, 이런 연극은 어르신들과 같이 봐도 좋겠구나, 어르신들도 연극을 보러 오실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면 그 할인 비용은 충분히 효과를 거두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관의 경로우대가 그렇듯이 말이다.

연극 속에서 아버지는 무대 위에 한 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신다. 그래도 아버지는 분명 거기에 계신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 노년은 분명 우리 곁에 있다. 연극의 주제나 소재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며 연극 구경을 하는 관객으로서의 노년도 생각해 준다면, 이 연극은 아마 최고의 '노년 연극'으로도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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