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81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6.15 13:24수정 2004.06.15 13:25
0
원고료로 응원
에인은 비로소 깨달아졌다. 자기가 여기 끌려온 이유는 닌이와의 일 때문이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에인이 힘차게 말했다.

"뱀을 잡으려다가 물에 빠진 것뿐입니다!"
장로들이 그가 지금 거짓말 한다는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고 노인은 비웃듯이 토를 달아 말했다.


"뱀을 잡으려고? 그럼 그 핑계로 여자를 덮친 것이로군?"
"다시 말하거니와 난 여자를 덮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적이 없다? 그럼 마을 사람들이 헛것을 보았다는 말이오?"
"어쨌거나 나는 여자를 희롱한 적이 없습니다."
"죄인은 알아두시오. 자기 죄를 부인하면 할수록 그 형벌만 가중될 뿐이오."

마을 사람이 지나가다가 보았다? 그렇다면 강간이나 화간으로 보였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진실은 본인이 알고 있다.

"그렇다면 피해자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진실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 피해자도 죄인이오."
"피해자가 죄인이라구요?"
"그 피해자는 올해 열다섯이오. 열여섯 전에는 그 어떤 남자를 봐서도 아니 되는 것이 이 마을의 법통이오. 그런데 그 아이는 나이도 차지 앉아 벌써부터 외간남자를 만났고, 그 외간남자는 또 그 미성년자를 강간했던 것이오."

그렇게 성숙해 보이던 닌이가 열다섯 살이란 것은 좀 뜻밖이긴 했다. 그러나 어쨌든 닌이마저 죄인이 되었다면 자신은 이제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뜻이다. 에인은 노인이 아닌 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은 촌장도 알 것 아닙니까? 한데 어찌하여 닌에게까지 벌을 준단 말이오?"
촌장은 대답 대신 고개만 저었다.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시늉이었다. 에인이 다시 물어보았다.


"그럼 닌이에게도 벌이 내려집니까?"
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인이 되물었다.
"데체 어떤 벌이 내려집니까?"

그러자 촌장은 잠깐 노인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그만 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여기서는 그 벌이 가장 큽니다. 만약 자의로 남자를 보거나 받아들였다면 마을 앞으로 끌려나가 주민들에게 돌을 맞아 죽게 됩니다."
'돌을 맞아 죽어? 닌은 오직 뱀 때문에 나를 불렀던 것뿐인데, 그럼에도 죽임을 당한다?'


그 형벌방식이 에인에겐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남자를 받아들이면 돌을 맞아 죽는다? 소호에는 그런 잔인한 법이 없었다. 에인이 다시 촌장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강간을 당했다면요?"
"일년간 근신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계속 부인을 한다면 결국 닌이가 죽게 된다는 뜻이었다. 자기 때문에 닌을 죽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이 꼬여 이 지경이 되긴 했지만 닌이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죄인은 자기 죄를 인정합니까?"
노인이 재차 다그쳤다. 에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이 연설조로 말했다.

"죄인은 우리 마을이 생긴 이래도 그 누구도 저지르지 않은 중죄를 저질렀소. 그것도 타방인이 말이오. 만약 죄인이 이곳 사람이라면 당장 참수형에 처해지겠지만, 그러나 멀리서 온 사람이고 그 점을 감안하여 형벌을 다소 감해주는 바이오."

장내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윽고 노인이 판결을 내렸다.
"죄인은'저 먼 지하세상으로' 보내진다! 준비 되는대로 곧 호송하라."

이곳 사람들의 말 표현을 참작하자면 '저 먼 지하세상'이란 소호 국법으로 유배를 뜻하는가 보았다. 그러나 먼먼 타향에서 다시 유배를 간다면 그곳은 또 어디란 말인가. 에인이 궁금해서 촌장에게 물어보았다.

"그 먼 지하세상이란 곳은 어디오?"
"글세, 난 잘 모르오만…."

촌장이 당황하더니 노인에게 물어봐주었고 노인이 대답했다.
"죽어서 가는 곳…. 그만큼 먼 곳이랍니다."

죽어서 가는 것만큼 먼 곳? 그 말만 들어도 현기증이 날 지경인데 그때 또 창을 든 남자들이 다가들어 그에게 오랏줄을 묶는 것이었다. 그는 오랏줄에 묶이는 순간 비로소 자신의 처지가 실감되었다. 그는 다급하게 두두의 외삼촌을 불렀다.
"촌장, 내가 자던 침대 옆에 나의 지휘 검이 있습니다. 끌려가기 전에 그것이라도 좀 가져다주시오."

촌장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단 형을 받은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가져다줄 수 없는 것이 이 마을 법통입니다."

그러자 그는 또 갈급하게 천둥이를 떠올렸다. 자신이 어디론가 멀리 끌려간다면 그때 천둥이는 달려와서 구해줄 것인가? 점점 다급해진 에인은 결국 책임선인이 가지고 있다던 금괴까지 떠올리고 다시 촌장에게 말했다.

"나에겐 금이 있소. 재판장에게 말해주시오. 원하는 대로 줄 수 있으니 내 죄목을 금과 바꾸어주시오."
촌장이 그 말을 전했으나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습니다. 강간죄목은 재물로도 바꿔지지 않는답니다."

그때 불쑥 태왕이 하사했던 그 함이 떠올렸다. 때가 되면 열어보라고 했고 아직 그 때가 아닌 것 같아 방치해두었는데 그 속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필시 그 속에는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그 무엇이 들어 있을 텐데…. 그러나 그것조차도 지금은 저 멀리에 있을 뿐이었다.

'아, 그럼 이제 내가 가진 것은 오직 내 몸뚱이뿐이란 말인가? 지휘 검도, 함도, 천동이도 다 잃고 턱없이 불끈거리는 이 육신 하나?'

그러자 다시 닌이가 떠올랐다. 그녀에게는 일년간의 근신이 내려질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 싶었다. 만약 어제 저녁 천둥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래서 자기가 떠나버렸다면 닌이 혼자 끌려가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여자 아이가 그렇게 죽었다고, 나중에라도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면 더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에인은 문득 궁금해졌다.
'한데, 천둥이는 왜 하필 그 시간에 두두의 말을 찾아갔던 것일까?'
그때 호송원이 그를 왈칵 떠밀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2. 2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3. 3 "집안일 시킨다고 나만 학교 안 보냈어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집안일 시킨다고 나만 학교 안 보냈어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4. 4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5. 5 겁나면 "까짓것" 외치라는 80대 외할머니 겁나면 "까짓것" 외치라는  80대 외할머니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