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87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6.23 10:24수정 2004.06.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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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키는 손님들을 별채로 안내한 후 공주 궁으로 향했다. 다음 차례가 공주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는 먼저 미용실로 들어섰다. 공주는 없고 시녀 혼자서 공주의 머리에 쓰는 관과 장신구, 팔찌, 긴 구슬 허리띠 등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있었다.


장신구들을 다 빼놓은 걸 보면 공주는 지금 침실에 있으니 그리로 오라는 뜻이었다. 그는 곧바로 침실로 향했다.

역시 공주는 발가벗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검고 윤기 흐르는 육신은 아직도 충분히 매혹적이었음에도 그에겐 이제 더 이상 탐나는 여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옷을 벗었다. 주어진 일과는 빨리 끝내는 게 상책이다.

"내 사랑, 손님들은 만났나요?"

그가 그녀의 배꼽을 애무하자 공주는 비음을 섞어 그렇게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젖가슴으로 입술을 옮겨갔다.

본래 그는 아주 부드러운 남자였다. 여체를 악기처럼 다루기를 좋아했고 여성들 역시 그렇게 조율해주기를 원했다. 공주도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갈수록 취향이 변덕스러워져서 날마다 격렬한 애무를 원했고, 그는 마치 성난 늑대처럼 공주의 엉덩이와 젖가슴을 물어뜯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행위'를 '늑대들의 전투'라고 혼자 명명했고 또한 어떻게 하면 오래도록 지치지 않는 공격수로 버틸 수 있는가 연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저 남성의 성기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이더냐. 발가락까지 오도독 깨물어주는 것이야 진종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 합궁을 시작하면 남성 자신도 서둘러 절정을 가지려는 본능이 있다. 하지만 아내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언제까지나 직립해 있기를 바랐다.


"내 사랑, 오늘 당신의 입술엔 열기가 없어요, 좀더 깊이 물어봐요, 그렇게, 아아, 당신은 사자보다 더 힘이 세군요."

그는 온 살갗을 이빨로 꾹꾹 깨물었다. 마침내 공주가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흥분이 고조된다는 신호였다. 한데 이상했다. 자신의 그것이 그만 시들시들 무너지는 것이었다. 장군 때문일 것이었다. 진종일 그의 영접만을 생각하느라 신경을 너무 많이 쓴 탓이었다.

"어서, 어서…."

공주가 보챘다. 그럼에도 자신의 그것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짜증이 악의로 화살처럼 곤두섰다. 그는 그만 공주를 흠씬 갈겨주고 싶었다. 도대체 사는 것이 왜 이렇게나 지겹단 말인가. 날마다 똑같은 일, 흥미도 재미도 없는 일들의 연속, 더 이상 매력적이지도 않은 여자와의 성희롱, 10년간이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해왔음에도 매일같이 강도를 높이려는 이 여자, 그럼에도 '한번 더, 한번 더…' 하고 조르는 아내.

그러나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애무를 시작했다. 그때 그녀의 발가락이 그의 샅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엄지발가락은 신기한 기술이 있어 그의 샅에 닿아 살살 문지르기만 하면 그의 남성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벌떡 일어서고 마는 것이었다.

마침내 성공이었다. 그는 공주의 성으로 깊숙이 침투했다. 늘 그렇듯이 짜증과 역겨움 속에서도 그 일은 잘 이루어진다는 것 또한 불가사의했다. 그는 자기의 임무를 훌륭히 치른 후 벌떡 일어나 옷을 입었다.

"오늘은 손님들과 연회를 열겠지요?"

공주가 그의 옷자락을 잡고 물었다.

"이제 나가서 준비를 시켜야지."

"그럼 나도 어서 머리단장을 시작해야겠군요."

"당신은 올 필요가 없어."

"먼 곳에서 온 손님인데 어떻게 내가 아니 가보지요?"

"당신이 오면, 손님으로 온 여자도 와야 하니까."

"왜 여자들이 가면 아니 되지요?"

"남자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 남자가 누구라고 했죠?"

"우리 모국의 왕자님이셔."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서둘러 또 그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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