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님들, 제 아내의 상식에서 배우십시오

교육개혁의 해법, 보통사람의 눈높이에서 찾아야

등록 2004.07.12 07:04수정 2004.07.13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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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상식에서 배우겠습니다."

모 회사의 광고 문안입니다. 이 선전용 문안에는 고객의 생각을 존중하겠다는 상업적인 배려만이 아닌 보통사람의 생각이 가장 옳은 판단일 수 있다는 철학적 사색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광고 문안를 접할 때마다 기분이 썩 좋아집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우리나라 교육정책 입안자들이 보통사람의 상식에서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봅니다.

지난 6월 15일, '제주도국제자유도시및경제자유구역내외국교육기관설립운영특별법(안)(이하 외국교육기관특별법)'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어 국회처리만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이 법안의 주요 쟁점은 ▲학생 정원 및 내국인학생 비율을 외국교육기관의 장이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하고 ▲교육과정을 이수한 졸업생에 대해 대한민국의 학력을 인정해 주고 ▲결산상 잉여금의 해외송금을 허용하는 것 등입니다.

법안이 통과된 다음날, 저는 학교에서 한 후배교사와 사뭇 진지하게 이 법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굳이 진지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학교에는 의외로 교육현안에 대하여 무관심한 교사들이 많은데, 그 후배교사도 그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와는 대학 선후배 사이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편입니다.

"이 선생, 우리나라에 경제자유구역이 있다는 거 알아 몰라?"
"알죠. 그런 것도 모를까 봐서요?"
"그럼 그곳에 외국교육기관이 설립된다는 것도 알겠네?"
"음, 들어봤죠. 솔직히 잘은 몰라요. 그런데 왜요?"

"제주시와 경제자유구역에 외국교육기관이 설립되는데 그 법안이 어제 통과됐어. 그런데 그 외국교육기관에 우리나라 학생도 입학할 수 있도록 허용한 거야. 그것도 내국인 입학 제안을 두지 않고 완전 자율로. 그러니까 가령 정원이 100명이라면 우리나라 학생을 99명으로 해도 된다는 얘기지. 정원을 늘리는 것도 완전 자율이고."

"그래요? 그럼 문제가 있는 거죠? 맞죠?"

이렇게 시작한 대화가 약 10분 가량 진행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선배교사에게 장난을 거는 듯한 표정을 짓던 후배교사는 얼마 되지 않아 차츰 대화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그 외국인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대한민국 학력을 인정해주도록 한 거야. 국내 대다수의 대안학교가 학력인정이 되지 않아 검정고시를 보아야 하는 것과 비교가 되는 거지. 더 큰 문제는 정부가 외국인학교 결산 잉여금을 본국으로 해외 송금할 수 있도록 허용해준 거야. 그러니까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학교를 세워서 학원처럼 돈을 벌 수 있게 해준 거지. 그러면서 국내 학교처럼 학력도 인정해주고 말이야."

여기까지 말하고 난 뒤, 제주시와 경제자유구역에 설립되는 외국인학교는 국내법에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과, 이로 인한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서 얘기를 하려던 참인데 후배교사가 갑자기 여성 특유의 펄쩍 뛰는 표정을 짓더니 말까지 더듬어가며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마, 말도 안 돼.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됐어요. 그거 막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했어요?"


"어제 국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니까."
"국무회의? 어느 나라 국무회의요?"
"어느 나라는 어느 나라야, 우리나라지."
"아니, 우리나라 국무회의에서 왜 그런 법을 통과시켜요?"

그날 후배교사의 황당하고 허망해하는 표정에서 저는 엉뚱하게도 어떤 희망 같은 것을 읽고 있었습니다. 평소 교육문제를 자주 거론하거나 교육을 바라보는 시각이 비슷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그런 느낌이었지요.

교육현안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어떤 입장이나 편견이 없을 수도 있는 후배교사의 상식에서 튀어나온 말이기에 더욱 신뢰감이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후 몇 주가 지났습니다. 집에서 아내와 함께 저녁 뉴스를 보고 있는데 마침 교육부가 국회교육상임위에서 발표한 사립학교법 개정에 방향에 대한 주요 내용들이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교원 임면권을 학교장에게 부여 ▲이사의 친인척 비율을 하향조정 ▲비리관련자의 학교복귀 제한요건을 강화 ▲문제학교의 구성원에 일부 이사추천권 부여 등이었습니다. 방송을 듣고 있다가 아내가 느닷없이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 정도면 된 거야?"
"뭐가?"
"사립학교법개정 말이야. 저 정도면 만족할만하냐고."
"글쎄, 방송만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진보진영에서는 이 정도로 만족할 것 같지는 않은데. 반대로 사학재단은 이 정도 가지고도 죽는 소리를 할 것이 뻔하고."

아닌게 아니라, 이틀 뒤 여러 매체를 통해 정부의 발표 내용에 대한 각계의 반응을 살펴보니 전교조를 비롯한 43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사립학교법 개정운동본부는 '턱없이 미흡하다'는 반응을 보인 반면, 사학법인은 `사학의 존립근거가 없어진다'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아내와 저 사이에 이런 말이 오고 갔습니다.

"전교조와 시민단체는 공익이사제를 주장하고 있어. 이사회를 처음 구성할 때부터 학교구성원들이 추천하는 사람을 일부 이사로 임명하자는 주장을 하는 거지. 이사의 친인척 비율을 줄이는 정도로는 재단의 비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없다는 거지. 반면에 사학재단 관계자들은 왜 소수에 불과한 비리사학 때문에 건전한 사학까지 죄인 취급을 받고 그런 불편함을 겪어야 하느냐는 볼멘 소리를 하고 있고."

"비리를 저지르지 않을 거면 법이 강화된다고 불편할 게 뭐 있어. 뭔가 꿍꿍이가 있으니까 그런 거지. 그리고 육영사업을 하는 목적이 뭐야? 사회에 좋은 일하고 그 대가로 명예나 보람 같은 것을 얻는 거잖아. 요즘 같으면 육영사업을 한다고 누가 존경이나 하겠어. 하지만 법이 강화되어 학교 재정이 좀더 투명해지면 자연히 존경심도 생기겠지. 난 사학재단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공익이사제 찬성이다."

저는 아내의 식견에 사뭇 놀라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대단한 말로 들리지 않았는데 곰곰히 생각할수록 더 이상의 논란이 불필요할 만큼 명쾌한 결론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내의 상식의 승리라고나 할까요?

이제 '외국교육기관특별법'과 '사립학교법개정'은 각각 국회에서 표결절차와 입법과정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제 후배교사와 아내와 같은 보통사람의 눈높이에서 교육문제를 풀어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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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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