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산대놀이 89

멈춰버린 그림자

등록 2004.07.26 08:48수정 2004.07.26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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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자승이 왕실의 핏줄이라니요?"

다방골 깊숙이 위치한 끔적이의 집에서 애향이와 함께 혜천스님의 얘기를 들은 백위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네. 방계(傍系)이긴 하지만 틀림없는 왕실의 혈통이라오. 게다가 왕통을 이어갈 구실도 충분히 가지고 있소. 허나 내 불찰로 인해 이젠 생사마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소만."

혜천과 끔적이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찌하여 스님이 왕실의 혈통을 데리고 다니며 팔도를 유람하게 된 것이옵니까?"

혜천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위로 해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거 모두 말하리다. 모든 건 평서대원수 홍경래의 뜻을 이어받기 위한 것이었소."


"홍경래!"

백위길은 몸을 떨며 혜천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만고의 역적을 포교 앞에서 입에 담는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뜻을 이어받는다'란 말은 내어놓고 반역을 꾀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홍경래를 따르던 사람들 대부분이 정주성에서 옥쇄(玉碎)하고 말았지만 각지에 흩어져 경과를 보며 언제 끼어 들어 한몫을 볼 것인가를 재어보던 이들도 많았소. 이들이 나와 땡중노릇을 하는 박충준 일당이외다. 홍경래가 실패한 후 사람들은 홍경래가 왜 실패했는지를 거울삼아 부단한 노력을 했소. 그 결론은...... 지금 현 상황으로는 아무것도 아니 된다는 것이었소이다. 태조의 역성혁명과 맞먹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소."

백위길은 혜천의 입에서 자신의 생각을 넘어서는 엄청난 얘기가 나오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백위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혜천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오. 수 백년을 이어온 사직이 쉽게 무너질리도 없는데다가 백성들은 당장 눈앞의 삶에 쫓기는 것이 고작이오. 배를 곯고 곯다가 못 참으면 민란을 일으키지만 그때뿐이었소.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다 해도 민심을 사로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외다. 구중궁궐에 있는 왕이 어찌 이런 일을 알 것이오? 설사 알려고 한다해도 탐관오리들이 눈앞을 가리고 있는데 이를 어찌 할 것이오? 지금의 왕은 폐위시키고 다른 이를 내세워야 한다 이것이외다. 방방곡곡의 삶을 보고 배운 왕실의 혈통이 왕위에 오르면 신하들도 더욱 쉽게 주변을 정돈할 수 있을 것이외다. 그러나 박충준 일당은 달랐소. 그들은 나조차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을 꾸미고 있소이다. 어쩌면 이는 내 업보일는지 모르오. 돈을 모으기 위해 도둑질을 하고 장물로 고리대까지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억장을 무너지게 했는지 알 수조차 없소. 그 길로 난 박충준 일당을 멀리하고 이 아이가 함부로 이용당하지 않기를 바라며 데리고 다닌 것이라오."

백위길로서는 혜천의 장황한 말을 듣고 있자니 머릿속이 텅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애향이도 같은 기분인지 혜천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딴전을 부리고 있는 듯 했다.

"내가 당장 포도청으로 잡혀가도 마땅한 소리를 하는 이유는...... 백포교가 도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외다. 이미 포도청에까지 그들의 손길은 미쳐있소."

"그런 일이라면 더 이상 말려들고 싶지 않습니다. 못 듣고 못 본 것으로 할 터이니 그만 둡시다."

백위길의 말에 끔적이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혜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말려들고 싶지 않아도 이미 소용없소이다. 포도청의 사람들도 상당수가 이 일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되어 있는데 어찌할 것이오? 당장 애향이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될 뻔하지 않았소?"

그 말에 백위길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머릿속이 뒤엉킬 지경이었다.

"이제 백포교는 어느 쪽을 분명히 선택해야 하외다! 어찌 하시겠소? 우리를 돕는 것이 그대에게 이로울 것이외다!"

백위길은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망설이다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는 듯 혜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앞으로 어찌 도우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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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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