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 가난 여행을 떠나 보자

이승은 지음 <다음 정거장은 희망역입니다>

등록 2004.07.26 14:33수정 2004.07.28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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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게…,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돌아가는 것…. 인형 작가 이승은 선생의 첫 산문집을 읽고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혼잣말이랍니다. 남편 허헌선 선생과 함께 선보인 <엄마 어렸을 적엔…>의 인형 전시회는 1996년 겨울 이후 한동안 '이승은 신드롬'이란 말까지 나올 만큼 열띤 호응을 얻었지요. 아쉽게도 저는 여태 한번 가본 적이 없습니다만, 인터넷과 신문 방송을 통해 어떤 전시회인지 알 만하다고 쉽게 넘겨 짚고 있었지요.

하나 이 소박한 책을 읽는 동안 제 마음이 스멀스멀 바뀌는 걸 느꼈습니다. 처음엔 허전하다 싶어 좀 지루하더니 책장을 넘길수록 물끄러미 상념에 빠지게 되고 종내는 부산스럽게 제 몸 곳곳을 어루만지며 꼬물꼬물 기어다니는 낡은 기억을 만나야 했거든요.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살며시 알 것 같았습니다. 이승은 선생의 인형전은 관람객 각각의 눈으로 마주볼 때에만 저마다의 마음 밭에 묵혀둔 오랜 기억의 싹을 다시 틔워내고 잊었던 대화를 술술 나누게 만드는 주술 걸린 전시회로구나 하고 말이지요.

그것은, 우리네 삶처럼 못생긴 인형들은, 그것들의 주술은, 바로 '가난'이었습니다. 1950∼60년대에 십대를 보내고 70∼80년대에 대학을 나와 결혼을 한 선생의 지난 생애는, 늦깎이 독자인 제 눈에는 온통 가난한 생활이 만들어낸 남루한 흔적들이고 가난한 마음에 깃든 소박한 마음가짐이자 가난의 실로만 깁고 또 기울 수 있었던 희망이라는 것, 지금은 켜켜이 먼지 쌓여 애써 털고 닦아야 겨우 알 수 있는 그런 이야기 같았습니다. 아무도 가 보지 않는 오래된 뒤뜰을 어슬렁대는 기분이 들어 제 마음이 어찌나 한적했던지 모른답니다.

"이제야 가난한 그림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가난한 그림이란 아무리 주어도 늘 모자라게 주는 것 같은, 넉넉히 채워 주지 못해 늘 안쓰러워 하는 가난한 사랑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온 마음과 온 힘으로 애쓰며 그리는 그림이 아닐는지."

알다시피 가난의 풍경도 세월 따라 퍽이나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모두가 가난해서 허리띠를 졸라맸지요. 요즘은 누군 더 가난해져 졸라맬 허리가 없어진 반면 누군 주체 못할 만큼 부자가 되어 역시 허리가 없어졌지요. 과거에는 모자라서 더 나누려고 하며 살았지만, 이제는 넘쳐 나서 버리면 버렸지 나눌 수가 없게 되었지요. 부족함이 풍성함을 낳고 안쓰러움이 넉넉함을 기르는 모습은 좀체 만날 수 없는 세상으로 변해 버렸으니까요.

해서 오늘 책으로 다시 만나는 저자의 인형 이야기들은 어쩌면 '그때 그 시절을 아십니까?'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당장의 삶이 고달플 때마다 가난했던 시절로 훌쩍 추억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나이든 세대야말로 정말 행복할 것 같다는 짧은 생각도 부록처럼 달려나옵니다. 지금은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는 가난했기 때문에 말이지요. 혹은 모든 과거란 아름다워지기 마련이기도 하니까요. 현재의 여유가 길어 내는 과거는 안전하게 퇴색하며 필요에 따라 각색되는 것이니까요.

한번 가난했던 과거로 가보지요. 외풍 심한 방 아랫목에서 담요를 당기다가 안에 든 아버지 밥주발을 엎고 놀라던 형제 자매를 다시 만나고, 수박 한 덩어리로 대식구 돌려먹느라 얼음 설탕물에 고작 수박 몇 조각이 전부였지만 늘 풍성했던 한여름의 평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두부 한 모와 몇 가지 찬거리를 사면서도 투정 부리는 아이 손을 잡고 시장을 돌고 또 돌았던 엄마의 잰 걸음을 다시 따라가고, 공부 못하는 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름 석자를 또박또박 불러 주고 웃어 준 국민학교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겠군요.

전구알을 넣어서 정성껏 헌 양말을 깁는 할머니, 내는 돈보다 덤으로 더 보게 해 주던 만화가게 아저씨, 여러 모양과 무늬를 찍어 주고 잘못 떼어내면 한번 더 하게 해 주던 뽑기 아줌마, 명절마다 바리바리 선물을 싸서 내려가는 공장의 나이 어린 언니들, 동네 골목 가로등 아래에서 어린 남동생을 포대기로 엎고 부모님을 기다리는 누나, 대합실에서 타지로 길 떠나는 딸 아이 목도리를 여며 주던 어머니도 물론 기다리고 있답니다. 이승은 선생의 인형전에서, 이 산문집에서, 그리고 당신의 오랜 기억 속에서.

"그때가 왜 새삼 사랑스러운 추억처럼 느껴지는 걸까? 가난을 그리워하는 것도 아니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닌데…."

"나는 5, 60년대의 이야기들을 작품으로 표현했다고 하면서, 가난하지만 정이 있었던 그 시절을 그렸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내가 그 시절을 얼마나 가볍게 표현했는가 하는 생각으로 가슴에 묵직한 것이 얹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승은 선생은 산문집 곳곳에서 보일 듯 말 듯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망설이고 있었지요. 이런 상념이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더욱 덤덤하게 심심하게 만들고 있다 싶더군요. 아마도 그것은 떠올리기조차 싫을 만큼 대물림되는 과거의 가난을 곱으로 등지고 살아가는 또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리워할 가난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큰 상실 때문에 치유되지 못하고 있는 또 다른 기억들 속에서, 지금 이곳에서 회고하는 가난의 이야기들이 마땅한 주소를 찾지 못하는 것을 이승은 선생이 솔직하게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지요.

그만큼 이승은 선생은 50∼60년대를 돌아보는 현재의 맥락에 대해서도 꾸밈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옛날 이발소 풍경을 만들어 놓고 간판 제목을 달지 못해 끙끙대다가 '희망이발소'라 이름 붙여 놓고는 "조금 전까지 이름도 없이 초라하게 서 있던 이발소가 갑자기 활기찬 공간으로 바뀌어" 무척 신나 하는 어린 아이 같은 모습 그대로 과거의 가난 이야기를 갈무리해야 할 지금 이곳의 위치와 의미를 조심스레 가늠하고 있지 싶습니다.

오늘날 가난이란 무엇인가? 가난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승은 선생이나 독자인 저나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이 이 산문집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선생의 인형전을 감상하는 가장 속 깊은 관람일 것이라고, 저는 책장을 덮으면서 생각했답니다. 낭비가 더 큰 결핍을 양산하는 시대에, 나눌 줄 몰라서 항시 빼앗길까 봐 꼭꼭 감추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선생의 산문집과 인형전에서 걸어나올 때 흐뭇하게 한아름 싸들고 나올 가난이 지금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당신과 나의 몫이겠지요.

그것은 여전히 치열한 물음표일 수도 있겠고, 한순간의 아련한 느낌표일 수도 있겠고, 또는 느긋한 쉼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마침표로 이미 끝나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저는 선생의 산문집과 앞으로 또 있을 인형전을 통해 저마다의 가난을 환기하고 나오시는 분들이 소박한 물음표를 가슴에 안고 나오기를 바라게 됩니다. 나는 지금 가난하게 살고 있는가? 나는 가난하게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가난이라는 단어를 불행과 동의어로 만들었지만 사실 그것은 행복의 원천"이라고 설파한 톨스토이의 말처럼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자발적 가난을 실천해 온 수많은 분들의 소박한 삶과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것이 얼마나 원대한 세계와 소통하는 삶인지, 동시에 얼마나 한없이 소박한 삶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오랜만에 화들짝 열린 제 마음의 대문이 바람 부는 대로 삐걱삐걱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네요.

외면적인 가난과 내면적인 가난을 나누고, 내면의 가난을 외면적인 풍요의 위기에서 벗어날 대안처럼 떠받들고 있는 요즈음, 가난했던 그때를 몸소 살았던 선조들의 희망이라는 것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의 미래를 향한 구호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은 몸이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마음도 가난해질 수 있었다는 단순한 이치라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복잡하게 헝클어 놓고 갈피를 잡겠다고 하는 것인지, 열린 문으로 시원하다 못해 조금은 춥기까지 한 어떤 바람이 휭휭 불어옵니다.

올 여름 더위 걱정하세요? 가난 여행을 떠나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정거장은 희망역입니다

이승은 지음,
화니북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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