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딴 풋고추에 썬한 막걸리 한 잔 드이소"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82> 풋고추

등록 2004.08.08 19:20수정 2004.08.10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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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싱싱하게 매달린 풋고추

싱싱하게 매달린 풋고추 ⓒ 이종찬

할머니! 고추는 왜 빨갛게 익어요?
부끄러워서 그렇게 익지
왜 부끄러워요?
늘 고추를 내 놓고 있으니 부끄러울 수밖에


할머니! 고추잠자리는 왜 빨개요?
창피해서 빨갛지
왜 창피해요?
늘 발가벗고 있으니 창피할 수밖에


그해 여름은 숨이 턱턱 막혔다. 오후가 되면 가끔 불어와 이마에 총총 맺힌 땀방울을 식혀주던 실바람도 불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말간 하늘에선 땡볕만 바늘처럼 따갑게 쏟아져 내리고, 마을 곳곳에서는 참매미가 고막이 터지도록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목이 탔다. 얼음처럼 차디찬 우물물을 벌컥벌컥 마셔도 돌아서면 이내 목이 말라오기 시작했다. 어찌나 물을 많이 마셨던지 한두 발짝만 걸어도 배에서 물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간혹 땡볕을 칙칙 식히며 번개처럼 쏟아지다가 비음산 아래 휘황찬란한 무지개를 걸어놓고 금세 어디론가 사라지곤 하던 그 여시비(여우비)도 내리지 않았다.

졸음이 스르르 올 때면 '뜸! 뜸!' 하고 들려오던 뜸부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잊을 만하면 '호오 호~' 하며 마당뫼에서 푸더덕 날아오르던 장끼도 보이지 않았다. 마산쪽 하늘에 검붉은 노을이 천천이 물들기 시작하는 데도 모논에 김을 메러 간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돌아오시지 않았다. 우리집 앞 도랑가에서는 잠자리만 떼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이고~ 머슨(무슨) 날이 이래 덥노. 사람을 푹푹 삶아 직일라(죽이려) 카네."
"올개(올해)는 논바닥에 잡풀하고 거머리도 어떠기(어찌나) 우글거리던지, 이래 가꼬(가지고) 쌀농사나 제대로 지어 묵것나."
"그나저나 땡볕에 상추도 다 녹아 없어지뿟고, 올 저녁반찬은 뭘로 하꼬. 고마 된장에 풋고추나 찍어묵어까요?"
"언제는 고추 말고 딴 반찬이 있었나. 풋냄새 나는 거 말고 맵상하고 실한 놈으로 골라 한주먹 따오라메."



a 싱싱하게 매달린 풋고추를 바라보면 서너 개 따고 싶다

싱싱하게 매달린 풋고추를 바라보면 서너 개 따고 싶다 ⓒ 이종찬

a 이 풋고추를 따서 금방 장독대에서 퍼낸 구수한 된장에 푸욱 찍어 먹고 싶다

이 풋고추를 따서 금방 장독대에서 퍼낸 구수한 된장에 푸욱 찍어 먹고 싶다 ⓒ 이종찬

그날, 이 세상을 죄다 태워버릴 것처럼 이글거리던 해가 장복산에 그 둥근 얼굴을 반쯤 가릴 무렵, 삽이 담긴 지게를 진 아버지의 뒤를 따라 어머니께서 긴 그림자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의 옷은 마치 소나기에 젖은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금세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논흙이 허옇게 말라붙은 부모님의 장단지 곳곳에는 거머리가 피를 빨아먹은 흔적이 또렷했다. '소 여물은 줏나'라고 하시며 헛간에 지게를 내려 놓다가 '후유' 하고 한숨을 내쉬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정말 고되 보였다. 머리에 쓴 수건을 풀어 땀을 닦는 어머니의 까맣게 그을린 팔, 군데군데 껍질까지 하얗게 일어나고 있는 어머니의 팔 또한 몹시 가늘어 보였다.


"너거 배 많이 고푸제?"
"야."
"쪼매마(조금만) 기다리거라. 내 퍼뜩 앞산가새 가서 싱싱한 풋고추 좀 따오께. 올 저녁에는 구수한 된장에 금방 딴 풋고추나 푹푹 찍어서 묵자."
"또 풋고추?"
"와? 너거들은 풋고추가 싫나?"
"아…아이다. 그라모 안 매운 것도 좀 따온나."


그때는 정말 특별한 반찬이 없었다. 하루 세 끼 내내 빠지지 않는 것이 열무김치와 풋고추, 막된장 그리고 가지와 미역을 넣은 오이냉국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군말없이 쌀알 서너 개 섞인 보리밥을 오이냉국에 말아 한 입 넣은 뒤 매콤한 내음이 나는 풋고추를 막된장에 푸욱 찍어 드셨다.

그게 어찌나 맛있어 보이던지, 우리 형제들도 아버지처럼 그렇게 오이냉국에 보리밥을 만 뒤 조그만 풋고추를 골라 된장에 찍어 먹다가 너무 매워 팔짝팔짝 뛰기도 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작은 고추가 더 맵다는 옛말도 모르냐' 라고 하시며 얼른 주전자에 담아놓은 차디찬 우물물을 한 대접 부어 주셨다.

그때부터 아버지께서는 '고추는 큰 기 더 안 맵다'라고 하시며 큼직한 풋고추를 반으로 툭툭 부러뜨려 냄새를 맡은 뒤 맵지 않은 풋고추를 골라 우리 형제들에게 주셨다. '풋냄새만 풀풀 나는 이거로 머슨 맛으로 묵노'라고 하시며.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일부러 매운 것만 골라 드셨다.

a 따가운 땡볕 아래 빨갛게 물든 고추

따가운 땡볕 아래 빨갛게 물든 고추 ⓒ 이종찬

a 어릴 때 끼니 때마다 밥상에 오른 것이 풋고추였다

어릴 때 끼니 때마다 밥상에 오른 것이 풋고추였다 ⓒ 이종찬

"너거들 풋고추 이기 사람 몸에 울매나 좋은 줄 잘 모르제? 맨날 이 풋고추로 세 개씩만 묵어모 아무리 더버도(더워도) 몸에 잔병이 하나도 생기지 않는다 카더라."
"그라모 한꺼번에 풋고추로 항거슥(많이) 따 놓으모 되지, 와 맨날 밥 묵을 때마다 쪼매씩만 따오노?"
"풋고추 이것도 금방 땄을 때가 맛이 있지, 한꺼번에 많이 따나모(따놓으면) 맛이 떨어지는 기라. 돌아서모 금방 음식 시는 거(상하는 거) 맨치로(처럼)."


아버지께서는 매운 풋고추를 참 잘 드셨다. 촌사람들의 힘은 매운 풋고추와 된장에서 나온다고 하시면서. 그리고 술을 드실 때에도 늘 매운 풋고추를 금방 떠낸 막된장에 찍어 드시거나 아니면 멸치젓갈에 찍어 드셨다. 간혹 살이 다 삭지 않은 멸치가 보이면 그 멸치를 통째 매운 풋고추에 올려서 우두둑 씹어 드실 때도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매운 풋고추를 잘 먹는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장가 갈 때 이쁜 각시도 얻을 수가 있고 튼튼한 아들을 쑥쑥 잘 낳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어지럼증이 있거나 입맛이 없고 소화가 잘 되지 않을 때 매운 풋고추를 먹으면 금세 그런 증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고 하셨다.

"제사 음식을 할 때나 고춧가루를 안 쓰지, 고춧가루가 안 들어가는 음식이 오데 있더노. 그라고 고추 이거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똥배가 안 튀어나온다 아이가."
"우리 선생님은 매운 거로 너무 많이 묵으모 위로(위를) 상한다 카던데."
"아, 뭐든지 욕심을 부리모 탈이 나는 기라."


a 오늘 저녁, 금방 딴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시원한 막걸리 한 잔 어때요?

오늘 저녁, 금방 딴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시원한 막걸리 한 잔 어때요? ⓒ 이종찬

나는 지금도 어디 여행을 다니다가 고춧대에 싱싱하게 매달린 풋고추를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서너 개 따고 싶다. 그리고 그 풋고추를 차거운 우물물에 대충 씻어 금방 퍼낸 구수한 된장에 푸욱 찍어 먹고 싶다. 그리하여 입안이 매콤하고 알싸해지면 썬한(시원한) 막걸리 한사발을 꿀꺽꿀꺽 마시고 싶다. 그때 내 아버지께서 그랬던 것처럼.

특히 요즈음처럼 무더운 여름밤, 모깃불 연기가 칼칼하게 피어오르는 마당에 놓인 평상에 앉아, 아니 간혹 드러누워 별자리를 찾기도 하면서, 가까운 동무들과 오손도손 둘러앉아 매운 풋고추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사발을 들이키고 싶다. 오늘 저녁, 금방 따낸 풋고추 안주 삼아 썬한 막걸리 한 잔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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