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행 밤기차 안에서의 하룻밤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81> 서울일기<2>

등록 2004.08.05 13:48수정 2004.08.0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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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날 영등포행 밤기차 안에서 만난 그녀는 캄캄한 밤하늘에 뜬 반달과 같았다

그날 영등포행 밤기차 안에서 만난 그녀는 캄캄한 밤하늘에 뜬 반달과 같았다 ⓒ 이종찬

"저어기~ 주무세요?"
"아, 예. 근데 왜 그러십니까?"
"그냥 잠도 오지 않고 심심해서 같이 이야기나 하면서 올라가면 어떨까 해서요?"
"……"



막 잠이 설핏 들었을 때였을까. 부산역에서 내 옆에 앉자마자 몹시 피곤하다는 듯 눈을 살포시 감고 있었던 그 아가씨.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긴머리 아가씨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리고 마른 오징어 반 토막을 찢어 내게 건네며 배시시 웃었다. 동그랗고 까만 눈망울에서 툭툭 던지는 눈웃음이 참 예뻤다.

자신의 이름을 '진'이라고 불러라 했던 그 아가씨는 동대문 근처에 살고 있다고 했다. '부산에는 왜 갔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 그냥 혼자서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제도 서울역에서 밤 기차를 타고 어제 새벽에 부산에 도착한 그녀는 광안리와 해운대 달맞이고개를 둘러보았다고 했다.

"고향이 부산이에요?"
"아니, 창원입니다. 근데 늘 그렇게 혼자서 여행을 다니십니까? 친구들은 다 어떡하고예?"
"가까운 친구들도 많이 있지만 저는 밤 기차를 타고 혼자서 여행 다니기를 참 좋아해요. 직장이 서울에 있어요?"
"아, 예. 마포에 있는 조그만 사무실에 나가고 있습니다."


진의 물음에 나는 엉겁결에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래야 촌놈이라는, 아니 무작정 상경을 하고 있다는 그런 표시가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또한 마포라고 얼렁뚱땅 들러댄 것도 그 당시 내가 알고 있는 출판사가 대부분 마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내가 서울에 도착하면 반드시 찾아가 보고 싶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도 마포구 공덕동에 있었다.

"언제부터요?"
"몇 달 되지 않았지예."
"쿡쿡쿡.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깐."
"???"


진은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자꾸만 쿡쿡쿡 웃었다. 내가 대학생이냐고 물어도 진은 '아뇨, 직장에 나가고 있어요'라며 계속해서 웃기만 했다. 애써 서울말을 흉내내려고 노력하는 내 모습이 몹시도 우스꽝스러웠던가 보았다. 하긴 아무리 내가 표준말을 쓰더라도 거센 억양 때문에 금세 경상도 사람이라는 게 표시가 날 수밖에.

"어떤 직장요?"
"쬐끄마한데요."
"아니, 무얼 하는 곳인가 하는 그 말입니다."
"나중에."



아니, 나중에라니. 그렇다면 나와 다시 만나기라도 하자는 그 말인가. 서로 연락처도 주고 받지 않았는데? 하긴, 진에게 내 연락처를 건네주고 싶어도 연락처가 있어야 주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닌가. 그렇다고 진에게 먼저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런 낭패를 보았나.

그때 진이 그런 내 마음을 훤히 궤뚫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내 왼쪽 가슴 호주머니에 꽂아두었던 볼펜을 잽싸게 빼냈다. 그리고 핸드백에서 쬐그만 분홍빛 수첩을 꺼내더니 무언가를 적어 내게 건네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쬐끄만 곰돌이가 그려진 분홍빛 쪽지에 적힌 것은 진의 전화번호였다.


"아직 명함 없으시죠?"
"그…그걸 어떻게?"
"뻔하잖아요. 아무리 쬐그만 회사라고 해도 누가 신입사원한테 명함까지 파 주겠어요."
"……"
"하여튼 경상도 사람들 매너하고는. 하긴 그래서 제가 경상도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아도 속내가 참 깊다는 그거 땜에."


그렇게 진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어느새 무궁화호 열차는 수원역을 지나 영등포역에 닿았다. 진은 서울역에서 내린다고 했다. 아니, 서울역까지 같이 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었던 차표는 영등포역이 종착역이었다. 진과 나는 그렇게 아쉬운 작별을 했다.

"이곳으로 연락해도 돼요?"
"그럼요. 그래도 하룻밤을 같이 지낸 사이인데."
"잘 가요."
"꼭 연락하세요."


그때가 새벽 5시 가까이 되었던가. 하여튼 그때까지 영등포 주변은 제법 어둑어둑했다. 나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진이 앉아 있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자 진이 잠시 슬픈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눈웃음을 툭툭 던지며 하얀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나는 진이 탄 그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래 그곳에 서 있었다.

"아저씨! 자고 가세요. 잘 해 드릴게."
"총각! 이리 와. 우리집에 이쁜 아가씨들 참 많아."
"바빠요, 바빠!"
"에이~ 그러지 말고 잠시 쉬었다 가라니까."


불빛이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영등포역 광장 앞에 나오자 얼굴에 화장을 떡칠한 아가씨들이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미니스커트를 입고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아니,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허리띠를 쥐고 강제로 잡아끌었다. 아가씨들의 얼굴에서는 지독한 술내와 화장내가 코를 마구 찔렀다.

가만히 있어도 코가 베이는 곳이 서울이라고 하더니. 나는 찰거머리처럼 들러붙는 그 아가씨들을 겨우 뿌리치고 영등포역 광장을 벗어났다. 우선 간단하게 아침을 떼워야만 될 것 같았다.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보아도 내가 식사를 할 만한 마땅한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른 아침부터 칼국수나 국수, 자장면 같은 그런 밀가루 음식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서울에서의 첫 식사는 '정식'을 먹고 싶었다. 하지만 식당 유리문에 붙어 있는 메뉴판에는 내가 찾는 '정식'이라는 낱말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내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백반'이라는 낱말이 식당마다 버젓이 붙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백반이 정식이라는 것을 몰랐다. 내가 알고 있는 백반은 피부에 부스럼이나 종기가 났을 때 찧어 바르는 흰 고체약이었다. 근데, 식당에서 그런 약을 팔 까닭도 없을 테고. 혹여 서울사람들이 말하는 백반이란 음식은 닭백숙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정말 나로서는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그날, 나는 1시간 가량 정식을 파는 식당을 찾아 땀을 뻘뻘 흘리며 헤매다가 가까운 중국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서울에서의 첫 식사를 볶음밥을 먹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나는 고두밥 같은 쌀알이 입안에 뱅뱅 도는 그 맛없는 볶음밥을 먹으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 서울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만을 고집해서는 되는 곳이 아니다. 그리고 내 입맛에 척척 맞는 그런 사람들도 '정식'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이 볶음밥처럼 맛이 없어도 그렇게 서로 어울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곳이 서울이라는 곳이 아니겠는가. 내 입맛에 맞는 정식을 찾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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