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말한 바 '전형'이란 것이 아직도 존재한다면 전 <한국일보> 문학담당 기자 김훈은 '문학기자의 전형'으로 불려도 좋을 사람이다. 텍스트와 저자 소개로 지지부진 일관했던 기존의 문학기사 패턴을 깨뜨리고 자신만의 '패턴'과 '문장'을 창조해 나갔던 사람.
빛나는 문장과 매혹적인 패턴만이 아닌 후배 기자 이문재(시인)가 경의를 아끼지 않은 '자신의 온몸으로 연필을 밀고 나간' 삶의 태도 또한 지극히 문학적이며 드라마틱하다. 황동규와 이성부, 곽재구의 시가 가진 아름다움을 정확히 묘파해 그들을 '한국문학의 전설'로 만들고 이제는 자신이 전설이 되어 남은 '행복한 문학기자' 김훈.
최근 복간된 <내가 읽은 책과 세상>(푸른숲)은 1980년대 김훈이 만난 '시'와 '시적 풍경'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그의 첫 책. 여기에서 '젊은 시인'으로 지칭되던 이성복과 황지우, 고정희와 김용택 등은 덧없이 흐른 20여 년의 세월 속에서 어느덧 '중견'을 넘어 '중진'이 됐고, 고정희는 안타깝게 세상을 등지기도 했다.
최근에는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칼의 노래>와 이상문학상 수상작 <화장(火葬)> 등을 쓴 소설가로 더 이름이 높지만, 천만에. 역사는 그를 소설가가 아닌 문인과 문학을 누구보다 정확하고 따스한 시선으로 읽어낸 문학기자로 기록할 것이 분명하다. <내가 읽은 책과 세상>은 기자의 이런 믿음에 힘을 실어준다.
막역하던 후배시인 기형도(전 중앙일보 기자)가 스물 아홉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1989년. 김훈은 그의 죽음에 "그래, 그곳에도 누런 해가 뜨더냐.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는 조사를 얹어준다. 냉소와 자기혐오로 환멸을 견뎌온 김훈. 그의 문장은 죽음 앞에서조차 눈부셨다.
겨우 '견디는' 삶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 정미경 소설집 <나의 피투성이 연인>
▲민음사
흥청망청 즐기는 생이 아닌 고통과 오뇌 속에 겨우겨우 견뎌내는 삶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한 조각 동정과 한 줌의 연민조차 크나큰 죄가 되는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과 만날 수 있을까? 소설가 정미경이 <나의 피투성이 연인>(민음사)을 통해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가혹하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명품에 중독돼 몸을 파는 방송작가, 자신을 가르친 은사를 협박할 수밖에 없는 보험회사 사고처리원, 돈 잘 버는 치과의사와 가난한 다큐멘터리 감독 사이에서 사랑을 저울질하는 출판사 직원. 정미경의 소설에는 '착한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이 강요하는 가혹한 요구 앞에 무릎 꿇고 밥을 버는 우리가 그들을 향해 '당신은 왜 그렇게 사느냐'고 책할 자격이 있을지.
수록작 중 '비소 여인'은 정미경의 등단 작품. 외진 기숙 간호학교에서 낡은 정물화처럼 살아온 한 여자가 한 사내가 내민 손을 잡고 세상으로 나온다. 절망과 자기학대 속에서 '고통 없는 살인'을 반복하는 여자. 작가는 그 여자의 입을 통해 묻는다. "당신은 지상에서의 삶이 행복한가요?"
비소(砒素)를 탄 음식물이나 음료수를 상시적으로 먹은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주 조금씩 천천히 죽음 곁으로 다가간다고 한다. 정미경에게나 우리에게나 이 땅에서의 삶이란 '비소'를 섞은 뜨거운 국물 같은 것이 아닐까.
'대안 없는 치기'는 부담스럽다
- 권리 장편소설 <싸이코가 뜬다>
▲한겨레신문사
1990년대 중반.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분위기와 인물을 그대로 차용한 <바이 준>(무명시절의 김하늘과 유지태가 출연한 영화)이 나왔을 때, 한 평론가는 "한국 청춘영화 이상한 길로 접어들었다"는 말로 프랑스 유학파 젊은 감독의 치기를 조롱했다.
제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권리의 장편 <싸이코가 뜬다>를 읽은 기자의 느낌도 위에 언급한 평론가의 심정과 유사하다. 작품의 어디에서도 찾아지지 않는 주제의식과 산만을 넘어 난삽한 이야기 전개, 거기에 자랑하듯 늘어놓은 잡학까지 더해져 "제 아무리 젊은 작가의 대안 없는 치기라 해도 이건 과하다"는 푸념이 나올 정도다.
오난이라는 유학생이 일본에서 겪는 갖가지 사건과 그녀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싸이코가 뜬다>는 초현실주의 기법의 하나인 '낯설게 하기'라고 보기엔 철학적 기반이 약하다. 또한 "소설이란, 문제적 인물이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서사"라는 뤼시엥 골드만의 문장을 빌어 해석하기에는 지나치게 가볍다.
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박범신(소설가), 이경자(소설가), 임헌영(문학평론가) 등은 이 작품을 두고 "무력하고 권태롭고 경직된 소설장터에다 일으킨 자살폭탄테러", "번뜩이는 재치와 감각으로 무장", "탁월한 재능과 날카로운 현실 비판 의식"이라는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의 옳은지 기자가 옳은지에 대한 판단은 책을 읽은 독자들이 몫으로 남겨둔다.
| | 한줄, 그 이상의 의미로 읽는 신간들 | | | | 박건웅의 장편만화 <꽃>(새만화책)
기자의 감상 대신 우리시대 몇 안 되는 양심적 학자 중 한 명인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의 추천사를 옮기는 것이 이 책이 가진 가치를 더 유효적절하게 전할 듯하다.
"꽃은 과거와 현재, 사실과 진실, 희망과 절망의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실로 5년에 걸친 긴 인고의 시간이 만들어낸 진실의 재창조 작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만화란 지상 최고의 예술이다"라는 주완수(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이야기가 허언이 아니란 걸 느끼게 해줄 작품.
권여선 소설 <처녀치마>(이룸)
1996년 <푸르른 틈새>로 상상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권여선의 첫 소설집. '몰락하도록 정해진 우리들의 운명'을 들여다보는 서늘한 슬픔.
서영은 산문집 <내 사랑이 너를 붙잡지 못해도>(해냄)
누구라서 청춘이 아프지 않았을까? 그래도 그 아픔마저 그리운 젊은 날. 이상문학상과 연암문학상 수상작가인 서영은. 그녀가 들려주는 슬퍼서 아름다웠던 청춘의 나날.
고혜정의 <친정엄마>(함께)
"이 책을 아낌없이 주고도 더 못 줘서 한이 맺힌 세상의 모든 친정엄마들과 주고싶은 도둑인 세상의 딸들에게 바친다"는 저자서문이 가슴을 친다. 사촌누이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안도현의 <나비>(리즈앤북)
이제는 '시인'보다는 '어른을 위한 동화작가'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안도현. 그가 철없는 어른들에게 선물하는 또 하나의 동화.
아라마타 히로시의 <아주 특별한 공포체험>(사람과사람·정성호 역)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미스터리와 공포. 그것들을 소재로 한 예술의 발원지를 찾아 떠나는 무섭고도 즐거운 여행.
주성일의 (시대정신)
조선인민군 출신의 탈북자가 쓴 비무장지대(DMZ) 관찰기.
김영호의 <건달정치 개혁실패>(미디어집)
한국일보와 세계일보 기자 등을 거쳐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는 김영호의 칼럼 모음집. | | | | |
내가 읽은 책과 세상 - 김훈의 詩이야기
김훈 지음,
푸른숲, 2004
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민음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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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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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 새책 11권] 김훈, 죽음 앞에서도 눈부셨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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