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19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8.13 09:08수정 2004.08.1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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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가 다 끝났다. 새벽 다섯 시경이었다. 강 장수는 아침 8시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당장 출정해서 성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싶었다. 또 그래야 했다. 그는 정렬한 군사들을 돌아본 뒤 에인에게로 다가갔다.

에인은 아직도 천둥이와 꼭 붙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제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강 장수는 그 옆에 주저앉아 가만히 에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장군님, 준비되었습니다. 어서 출격하시지요."

대답이 없었다.

"장군님, 어서 가서 도륙을 내야지요. 천둥이를 죽게 한 그들을 모두 쳐죽여야지요."

에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강 장수, 난 천둥이 곁을 떠날 수 없소. 이 전투는 취소를 하시오. 난 천둥이를 두고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오."
"복수를 해야지요, 장군님. 천둥이를 위해서라도 그길 밖에 없지 않습니까?"
"아니오, 천둥이를 죽인 것은 바로 나요. 내가 강 장수와 참모들까지 속이고 몰래 행동한 나의 불찰이었소. 그런 내가 어떻게 군사들의 목숨을 책임질 수 있겠소. 강 장수, 이제 난 전쟁이 싫소이다. 자리 좀 비켜주시오. 난 천둥이와 해야 할 이야기가 많소."


강 장수는 일단 물러났다가 한참 후 다시 가보았다. 이번에 에인은 강 장수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강 장수, 아무래도 이번 전쟁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소. 강 장수 몫인 것 같소. 그러니 강 장수의 이름으로 치시오. 에리두는 강 장수 것이오."


강 장수는 아무 대꾸도 않고 일어나 하늘을 보았다. 벌써 동이 터오고 있었다. 장수는 갑옷을 여미고 힘주어 칼을 잡은 뒤 군사들 대열로 돌아갔다. 여명에 드러난 군사들의 얼굴은 모두 출전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는 칼을 더 힘주어 잡고 그 군사들 앞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자, 이제부터 나를 따라 크게 외쳐라. 에인 장군! 에인 장군!"

군사들이 복창하기 시작했고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그 복창이 큰 함성으로 일어났다.

"에인 장군! 에인 장군!"

수천 명이 동시에 외치는 그 소리는 하늘조차도 뚫어 버릴 만큼 우렁찼다. 그럼에도 강 장수는 대열들 속으로 누비고 다니며 '더 크게! 계속! 계속!'하고 부추겼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전쟁이 내 몫이라고? 그건 사실이지. 한데 이 전쟁을 내 이름으로 접수하라고? 천만부당한 소리. 몸으로 전쟁을 치르는 사람과 그 전쟁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다르다. 에인 장군, 애초 그대가 주장했듯이 우린 한필에 묶이긴 했으나 그것을 묶은 사람은 당신이다. 끈을 쥐고 있는 사람도 당신이다. 빨리 일어나라! 그리고 군사들 앞으로 걸어오라! 당신의 이름으로 묶여 있는 우리를 이끌어라...'

"에인! 에엔! 엔! 엔!"

이제는 에인이나 장군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군사들은 저마다 오직 엔!엔! 하고만 외쳤다. 그러나 그 우렁찬 외침에도 에인은 천둥이 등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날이 밝아왔다. 그림자로 누워 있던 강도 갈대도 슬금슬금 제 모습으로 일어나자 그 위로 해가 떠올랐다. 그때 제후가 대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땅을 보고 뚜벅뚜벅 걸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말했다. 당신은 반신반인이라고. 이제 나도 그걸 믿게 되었다. 그러니 일어나라. 일어나서 이곳에 당신의 신성한 도시를 세우라. 당신은 신이다. 한데 지금 그걸 잊고 인간의 고뇌에 빠져 몸부림 치고 있다. 어서 일어나라. 신성으로 일어나라. 두 주먹 불끈 쥐고 그 신성을 치올리라! 당신은 인간의 고뇌에 빠져 있을 그런 여유가 없다...'

그는 대열 가운데 우뚝 멈추어 서서 '엔릴!'하고 나직이 외쳤다. 아무도 되받아 복창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걸으며 '엔릴! 엔릴!'거듭 외쳤다. 릴은 이 지방의 말로 신이란 뜻이었다. 마침내 군사들이 그 말을 받아 복창하기 시작했다.

"엔릴! 엔릴!"

아침에 오리 덫을 보러 나왔던 하구의 어부들도 이 함성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엔이라는 신이 어느 강변에 내리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엔릴! 엔릴!"

그 함성이 에인의 넋에 접수되었다. 그는 '엔릴'이라는 말뜻을 알지도, 또 이제부터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칭송되리라는 것도 예측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넋이 지금 그 함성에 응답을 한 것이었다.

에인이 군사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강 장수가 손짓을 하자 은 장수가 에인의 갑옷을 가져다주었다. 그 갑옷은 야장 방에서 만든 쇠판을 안쪽에 끼워 넣고 시친 것이라 그 어떤 창날도 관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에인이 멈춰 서자 강 장수가 그에게 갑옷을 입혀 주었다. 그리고 투구를 씌우려고 그것을 막 받아들 때 저만치 벌판에서 말 한 마리가 이쪽을 향해 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두건을 쓴 젊은 남자였다.

그 말이 장수들 앞에 멈춰 섰다. 남장을 한 닌이었다. 그녀는 말에서 훌쩍 뛰어 내리더니 그 말고삐를 쥐고 에인 앞으로 다가왔다. 그 말은 두두의 천리마였다. 닌은 그 고삐를 장군에게 바치며 말했다.

"두두 오빠가 이 말을 장군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에인은 말없이 그 고삐를 받아 쥐었다. 그의 얼굴은 비장감으로 각이 져 있었고 그 비장감이 어깨에서 등으로 흘러내리는가 했더니 다음 순간 훌쩍 말 등에 뛰어올랐다. 투구도 쓰지 않고 그대로 뛰어올라 지휘 검을 높이 쳐들며 하늘마저 쩍 가르듯 크게 외쳤다.

"출겨억!"

그리고 에인은 기병들에게 말을 탈 시간도 주지 않고 먼저 앞질러나갔다. 에리두 전체를 혼자서 결딴내겠다는 태세였다. 강 장수는 에인의 투구를 손에 든 채 급하게 말에 오르며 소리쳤다.

"기병부터 서둘러라! 장군을 호위하라! 선인들은 보병을 이끌고 뒤를 따르라! 뛰어서 따르라!"

기병들이 사력을 다해 뒤를 따랐어도 그는 언제나 백 보 이상 앞서갔다. 강 장수는 간이 말라들었다. 성은 가까워오는데 그는 호위병도 없이 혼자서 호랑이 굴로 달려들고 있었다. 투구도 없이 맨 머리를 펄럭이며 그렇게 달리기만 했다. 따라 잡을 수만 있다면 투구라도 씌워줄 텐데, 그러면 창날이나 화살은 피할 수 있을 텐데…. 강 장수는 그 생각에만 쫓겨 죄 없는 자기 말 등만 불이 나게 채찍질을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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