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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어서 빨리 자기 국호를 선포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파르와 에리두만으로는 거대 국에 대한 이미지를 전할 수가 없었다. 또한 자신에게는 다섯이라는 숫자가 주어졌다. 그 다섯을 채웠을 때, 그러니까 5개의 도시를 가졌을 때 세상만방에 신성한 나라임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에인은 이 생각에 쫒기기 시작했다. 가능하다면 내년 봄까지는 모든 정복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자면 쉬지 않고 전쟁만을 강행해야만 할 것이었다.
벌써 다음 침략지도 정해졌다. 슈르파크였다. 이제는 아래에서 위쪽으로 치고 올라가면서 시파르까지 닿아야 했다. 그러면 바다에서부터 북쪽 시파르까지 모든 영역이 천신의 하늘이 되는 것이었다.
열흘 뒤에 에인의 군사들은 이미 슈르파크 도시 외곽으로 들어섰다. 용병들의 설명에 의하면 그곳은 아직 전제군주가 아닌 수장사회라고 했다. 그리고 그 용병이 덧붙였다.
"여긴 사람들만 밀집해서 살지 촌락이나 다름없어요. 통치도 순 구식이라 오래 전의 전통만 고수하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오래 전 촌락 공동체의 시대처럼 평등한 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 따라서 일반주민들 중 성년남자로 규합된 민회와, 씨족장들로 구성된 장로회가 따로 있으며 수장 역시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는 것이었다.
에인은 그 민주적인 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한 마을의 수장이라면 먼저 협상을 해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었다. 그는 용병 중 한 사람을 골라 연락병으로 보내면서 정중한 면담을 요청했다.
세 시간쯤 후 수장은 몇 명의 씨족장들과 함께 나귀를 타고 도착했다. 강 장수가 먼저 나가 그들을 맞이한 후 에인이 기다리는 천막으로 안내했다. 선인들과 제후, 할머니도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엔 의원님이 통역을 하시오."
에인이 뒤따라 들어오는 할머니를 보고 그렇게 지목했고 할머니도 '예, 그러지요'라고 대답했다. 전에 에인이 '부상자가 없을 땐 늘 참모들과 함께 동참하시오'라고 했을 때도 할머니는 그저 담담하게 '예, 그러지요'라고 수락했다.
할머니 자신은 사실 이번 전투까지 동참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에리두는 가장 큰 도시고 그만큼 인명손실도 많을 것 같아 자청했던 것인데, 이곳으로 출발하면서 에인이 다시 그녀를 동참 의원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에리두 전투에서 다친 부상자들을 그곳 의원에게 맡기고 이렇듯 따라나섰는데 에인의 요구는 갈수록 커져 이제 특별 참모의 자리로까지 그녀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에인으로서야 할머니의 능력이 인정되어서이겠지만 할머니는 직함 따위는 상관없이 오직 에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어 이렇듯 순순히 따를 뿐이었다.
상대국 사람들과 참모들까지 자리에 둘러앉자 곧 대화가 시작되었다. 에인이 먼저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귀하의 도시가 민주적으로 운영된다는 것에 큰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그렇다면 무슨 일로 이렇게 군사들까지 몰고 온 것이오?"
수장이 대뜸 반박하고 나섰다. 목소리도 꽤 깐깐했다. 에인은 가만히 그들을 주시하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나의 천신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이곳에 머물러 당신들과 한 가족이 되라고 제게 명령하셨소."
"천신이 누구란 말이오?"
"천신은 우리에게 性과 命과 精을 주셨고 도와 덕을 지키라 하셨소."
"도와 덕은 또 뭐란 말이오?"
"도는 천신을 섬김이요, 덕은 국가와 백성을 비호함이라, 하셨소. 또 우리의 천신은 조화와 교화, 치화를 담당하는 세분의 신도 함께 주셨소. 그 세분을 일러 삼신, 혹은 삼신일체라 부르오."
"그게 도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조화의 신은 우리의 性을 담당하시고 치화의 신은 精을 담당하시오. 고로 사람은 만물 가운데서 가장 귀하고 높은 것이며 또 그렇게 교화를 할 수 있다고 하셨소. 다시 말해서 이 삼위일체의 도는 대원일의 뜻이오. 당신들이 만약 이 삼신일체 상존유법 즉, 우리의 신과 그 도리를 받아들인다면 우린 여기에서 당신들의 평화를 보장할 것이오."
"만약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소?"
"우리는 이 도시를 반드시 접수해야 하오. 만약 거절하면 침략할 수밖에 없소."
"침략이라…. 그러니까 당신들이 우리 주민을 몰아내겠단 말이오?"
"다시 말하겠소. 우리의 천신을 받아들이고 당신들이 우리 천신의 백성이 된다면 우리는 당신들의 가옥은 물론 그 어느 것 하나 다치지 않을 것이오."
할머니는 아주 정확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그 말을 통역했다. 그러자 수장 일행들은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았고 그런 뒤 수장이 자기들 의견을 전했다.
"당신들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여러 타성의 씨족들이 모여서 살고 있소. 그들 모두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오. 그러니 시간을 주시오."
"시간이라면 얼마나?"
"내일 이 시간까지 답을 알려드리겠소."
"좋소이다. 현명한 대답을 기대하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인은 군사들의 진영 앞까지 그들을 배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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