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21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8.17 12:08수정 2004.08.17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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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투가 정말 신들의 싸움이었다면, 자기의 대행자 인간들을 앞세운 그런 싸움이었다면, 에리두가 그토록 참혹하게 패배한 이유는 아마도 그쪽 신이 너무 당황을 했거나 아니면 작은 일에 급급한 나머지 큰 것을 놓쳤던 것인지도 몰랐다.

첫 시발점부터 보자면, 한 남자가 혼자서 성벽을 돌아볼 때는, 그런 일이 전에는 없었던 일이라면 그는 다분히 정탐꾼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우선 철저한 대비나 대응을 하는 것이 정도였다.


한데 수문을 지키던 망루의 병사들은 '수문 가까이는 부정한 것이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라'던 궁중주술사의 당부만 철저히 따랐고 그래서 군주의 생일이 시작되는 첫 새벽에 말이 얼쩡거리기에 그냥 화살을 쏘아댔던 것이다. 그리고 내려가 확인해본 즉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기에 상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궁전 안을 접수하라!"

에인이 단상에 올라서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든 내빈들은 달아나고 그의 옆에는 오직 한 사람, 아직도 자기 목을 어깨에 걸고 있는 군주의 시체만 서 있었다.

해가 저물어갈 때까지 살육전은 계속되었다. 궐내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끌려나와 학살당하거나 쫓겨났다. 성안의 주택들도 남김없이 수색해 귀족과 남자들은 참살을, 여인과 아이들은 추방을 당했다.

그들은 여태 에리두의 신과 군주의 보호를 받아왔던 사람들이었다. 남겨두어야 천신의 백성이 될 수도 없는 존재들이라 추방령을 내린 것이었다.

그렇게 쫓겨난 아녀자들은 아이들과 함께 울면서 성밖으로 달아났고 그 행렬은 한동안 계속 줄을 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강 장수는 이제 성안의 주민을 순수한 백성으로 채울 차례라는 생각을 했다. 이동중인 환족을 수용한다면 천신은 만족해하실 것이다. 그것은 에인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는 곧 안내선인을 불러 전령을 띄웠다.


그날 밤이었다. 천둥이의 시체가 마차에 실려 왔다. 마차가 궁전 앞에 세워지자 기다리고 있던 할머니가 마차로 올라가 깨끗한 피륙으로 천둥이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피도 땀도 먼지도 모두 닦아냈다. 그리고 허브 향료를 발랐다.

할머니가 일을 끝내고 내려오자 군사들이 천둥이를 들것에 옮겨 실고 단상을 올라 궐내로 들어갔다.


궐내 중앙 홀에는 이미 제단이 준비되어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참모와 기병들이 천둥이의 몸을 받아 제단에 올렸다. 몸은 동쪽을 향했고 머리는 앞을 바라보게 놓여졌다.

봉상이 끝나고 참모와 기병들도 뒷자리로 물러나자 강 장수가 엄숙한 목소리로 제례를 선언했다.

"오늘 이 승전의 1등 공신은 천둥이오. 모두 절하시오."

모두 엎드려 절을 올렸다. 하지만 에인이는 절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영원한 작별의식이었던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도 천둥이를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녀석이 단 한마디라도 해주기 전에는 절대로 이별할 수가 없었다.

제례가 끝나자 에인은 모두에게 물러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천둥이와 단 둘이만 있고 싶었다.

밤은 점점 깊어 자정이 훌쩍 넘었다. 에인은 천둥이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움이 사무쳤고 그리하여 자기의 눈길로 녀석의 눈을 번쩍 뜨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녀석은 언제까지나 감은 눈 그대로였다. 긴 주둥이를 앞발에 놓은 채 입도 꼭 다물고 있었다.

"천둥아, 너 그렇게 언제까지나 자고만 싶니? 내가 널 성가시게 하는 거냐?"

에인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 천둥이의 머리가 변하기 시작했다. 조그맣던 녀석의 귀가 에인이 지휘봉에 있는 그 황소의 뿔과 똑같아졌고 그것이 점점 커져갔다. 얼굴은 분명 천둥이인데 거대한 뿔을 가진 황소의 모습으로 바뀌어버린 것이었다.

에인이 다가가 그 머리를 들어보았다. 틀림없는 천둥이요, 또한 틀림없는 황소였다. 한데 그 황소가 눈을 부릅뜨고 에인을 주시했다. 에인의 머리 속으로 번개같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거대한 소머리? 하늘의 강이라는 속말수… 신성한 머리… 아아, 소머리….'

에인은 그 머리를 놓고 뒤로 물러가 다시 바라보았다. 아직도 천둥이는 거대한 뿔을 가진 황소의 형상 그대로였다. 그는 급하게 강 장수를 불렀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강 장수는 득달같이 달려왔다.

"강 장수, 천둥이를 보시오."

강 장수가 천둥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처음 그대로일 뿐 어떤 놀라움도 나타나지 않았다. 에인이 앞질러 물어보았다.

"천둥이가 변하지 않았소?"

그러나 강 장수의 눈에는 변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에인에게는 분명 두 뿔을 가진 황소의 형상인데 강 장수에겐 그냥 잠자듯 누워 있는 천둥이었다. 에인은 안타까웠다. 강 장수 눈에도 천둥이가 황소로 보여야 한다, 그래야 한다.

"강 장수, 그러면 천둥이의 머리를 만져보시오."

강 장수가 다가가 천둥이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코끝으로 향료냄새가 화,하게 풍겨왔다. 고향에 많은 박하 잎 향내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귀를 만져보았다. 거기에 뭔가가 느껴졌다. 보이진 않지만 그것은 분명 뿔이었다.

"천둥이에게 뿔이 있군요."
"그렇소. 천둥이 얼굴이 황소로 변했소. 커다란 뿔이 달린 황소 말이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실 것이오. 환족이 이동하여 첫 열매를 맺은 천하(天河), 그 하늘의 강…."
"아, 그렇군요. 그 강은 여러 개의 의미가 함께 하지요. 신성한 물이라는 속말수, 하늘에서 힘센 황소가 내려왔다는 소머리 강…."
"그러하오. 강 장수. 천둥이는 죽어서도 나에게 새 나라의 국명을 일러준 것이오. 소머리 강처럼 서쪽의 이 땅에서도 그 법치와 전통을 이어가라고 말이오."
"새 나라의 국명이라면…."
"그렇소. 시파르에서 에리두까지 소머리 국이오. 앞으로 내가 접수할 모든 도시 역시 소머리 국이 될 것이오!"

에인의 목소리는 열에 떠 있었다. 신성한 나라 소머리 국…. 강 장수가 속으로 그 말을 뇌일 때 퍼뜩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며칠 후면 다음 출전을 생각하겠구나….'

강 장수의 예감은 옳았다. 열흘 후 에인은 다시 슈르파크로 군사를 휘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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