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이나 나비는 모란꽃에 앉지 않는다

정치 지도자들은 무엇보다 정명(正名)해야 한다

등록 2004.08.16 12:52수정 2004.08.1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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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 많고 약은 한 농부가 두메에 살았다. 두 섬지기 논을 머슴 없이는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머슴에게 주어야 할 새경이 아까워 꾀를 내서 자기 딸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한 소년과 삼 년 동안 새경 없이 머슴살이를 하면 딸을 주겠다고 약조를 했다.


그 소년은 열일곱 살이었고 농부의 딸은 열다섯 살이었다. 소년은 열심히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삼 년 동안 일을 했다. 자기가 마음을 둔 처녀가 지어주는 밥을 먹으면서 일하는 것이 더없이 행복했다. 이미 처녀도 일을 잘하고 믿음직한 사내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a 오어사 대웅전 모란꽃 창살

오어사 대웅전 모란꽃 창살 ⓒ 박철

그러나 욕심 많은 농부는 오로지 논에서 나는 곡식만을 생각했고 곡식을 팔아서 장궤에 넣어둘 엽전만을 생각했다. 삼 년이 지나자 소년은 스무 살 청년이 되었고 처녀는 방년 십팔 세가 되었지만 그 농부는 다시 꾀를 냈다. 그래서 딸애가 아직 어려 시집을 보내기가 어려우니 다시 삼 년을 새경 없이 머슴살이를 하자고 했다. 수더분한 그 젊은 사내는 못내 받아들였다.

딸은 아버지가 야속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비는 엽전의 수량 늘리기만 생각했고 딸은 사내의 가슴에 안겨지기만을 생각했다. 다시 삼 년을 기다려야 한다니 딸은 속으로 욕심 많은 아비를 원망했다. 아비의 밥상보다 머슴의 밥상을 더 정성 들여 차리기로 딸은 앙심을 품었다. 달라지는 밥상의 찬들을 보고 젊은이가 놀라기 시작했다.

주인 밥상에 오를 찬이 머슴 상으로 왔다고 여긴 젊은이는 밥과 국만을 먹은 다음 그대로 상을 부엌으로 들고 가 아무 말 없이 처녀에게 상을 물려주곤 하였다. 그렇게 몇 날이 지나자 처녀가 참지 못해 왜 밥상의 찬을 들지 않느냐고 사내에게 물었다. 그러자 사내는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타일렀다.

"주인장이 먹을 찬을 머슴이 먹으면 명분을 잃는 것이오. 당신과 내가 부부될 날을 기다리면서 열심히 일할 뿐이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당신의 아버지를 나는 원망할 수가 없소. 당신의 아버지는 내 장인이 될 분이오. 처부모도 부모인데 어찌 내가 부모를 원망한단 말이오. 그래서 다시 믿고 머슴살이를 하는 중이오. 그러니 거기는 아버지의 밥상을 정성 들여 차리고 내 밥상은 머슴 상으로 차려야 명분에 맞는 것이오. 다시 삼 년을 참고 열심히 일하면 당신 아버지께서도 두 번 한 약속을 어기지는 않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처녀는 사내의 가슴에 안겼다. 안겨 오는 처녀를 따뜻하게 안아준 다음 소에게 쇠죽을 주어야 할 짬이라면서 부엌일을 마저 하라고 타일렀다. 약은 아비가 숨어서 이 광경을 엿들었다. 아비는 그날 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딸이 아침 밥상을 들고 들어오자 아비는 모른 척하고 밥상을 보았다.

옛날의 밥상으로 돌아왔음을 보고 딸아이를 밥상 옆에 앉으라 한 다음 열흘 뒤에 혼례를 치를 작정이니 이제 머슴 밥상을 차리지 말고 겸상으로 차려서 사위될 놈하고 같이 먹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논어(論語)의 자로(子路)편에 정명(正名)이라는 말이 나온다. 정명이란 무엇인가? 참말이면 하고 그 참말대로 실천하는 것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으며, 설혹 거짓말을 했다면 그것을 뉘우치고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참말을 하게 되면 이 또한 정명일 게다.

얕은 꾀로 거짓말을 했던 농부는 정명이 무엇인가를 밤새 터득했던 셈이다. 의젓해진 아버지를 놀랍게 바라보고 있다가 얼굴이 붉어진 딸은 그 말을 듣고 쇠죽을 끓이고 있던 머슴에게 달려가 어젯밤처럼 다시 안겼다.

a 모란꽃.

모란꽃. ⓒ 박철

이와 같은 이야기는 머슴들이 모여서 밤일을 하는 사랑방에서 자주 구술되던 옛 이야기다. 주인은 명분을 잃어 부끄러움을 알았고 머슴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 곧 명분임을 보여 준 셈이다.

명분이 따로 있고 실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거짓말이 생겨나는 법이다. 옳지 않은 것이면 말을 하지 않고 옳은 것이면 반드시 말을 하고 말을 했으면 말한 대로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이 정명이다.

정치 지도자들은 무엇보다 정명해야 한다. 지도자가 거짓말을 일삼으면 결국 나라의 모든 문물이 흔들려 백성은 발붙일 곳을 잃게 된다. 지금 공약을 밥 먹듯이 한 다음 공약(空約)이 되게 해놓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정치인들이 너무나 많다.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거짓말투성이의 정치이다. 거짓말을 일삼는 지도자는 약조를 어긴 것을 부끄러워하고 딸을 준 그 농부만도 못하다.

자연은 거짓을 모른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 마침내 열매를 거두기까지 일체의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 하늘도 바람도 햇볕도 물도 땅도 자연의 순리를 따를 뿐이다. 모란꽃을 보라.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화려하지만 향기라곤 없고 꿀샘 하나 없다. 이를 아는 벌이나 나비는 모란꽃에 앉지 않는다.

인생은 허영(虛榮)이 아니다. 그리고 남에게 호감을 사려고 꾸미면서 사는 인생이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남에게 찬사를 받고 싶어서 가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다짐하면서 마음을 닦아 자신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는 사람으로 살 것인가? 이러한 물음은 죽어서 땅에 묻힐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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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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