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초라한 여인숙에서 보낸 일주일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85> 서울일기<4>

등록 2004.08.19 13:56수정 2004.08.19 15:56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구로공단 전철역 근처 초라한 여인숙에서 보낸 일주일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휘황찬란하게 구겨지는 저 불빛처럼 나에게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게 만들었다

구로공단 전철역 근처 초라한 여인숙에서 보낸 일주일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휘황찬란하게 구겨지는 저 불빛처럼 나에게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게 만들었다 ⓒ 이종찬

지하철 2호선 구로공단역 주변에 있는 그 초라한 여인숙에서 자는 둥 마는 둥 하룻밤을 보낸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피붙이 하나 없는 서울에서 살아가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돈이 우선이었다. 당장 아침을 먹으려 해도 돈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내 호주머니에서 돈이 떨어지면 모든 게 끝장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돈을 아끼기 위해 무작정 굶을 수도 없었다. 나는 호주머니에 든 지갑을 꺼내 남은 돈을 세어 보았다. 만 원짜리 25장과 천 원짜리 서너 장 그리고 동전 몇 개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부산역에서 영등포행 기차를 탈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 지갑 속에는 30만 원 가량의 돈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불과 하루 사이에 5만 원 가까운 돈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서울에서 일주일을 버티기도 버거울 것 같았다. 서둘러 달셋방을 구해 집에서 세 끼 식사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말 그대로 앉아서 코만 베인 채 쓸쓸히 낙향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불쌍한 처지가 될 게 뻔했다.

그 날부터 나는 달셋방을 구할 때까지 하루에 두 끼만 먹기로 했다. 아침과 점심은 11시쯤에 라면으로 대충 떼우고, 저녁은 재래시장에 가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시켜놓고 막걸리 한 병을 덤으로 먹기로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급한 일은 하루라도 더 빨리 달셋방을 구해 여인숙에서 탈출하는 것이었다.

우선 달셋방만 구한다면 쌀이나 밑반찬은 집에서 보내 줄 것이었기 때문에 돈 쓸 일이 크게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에 내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돈이 담뱃값과 차비, 막걸리 한 병 값 정도라면 얼마든지 서울에서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만약 생각처럼 그렇게 취직이 잘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선 막일이라도 하면 될 것 같았다.


나는 매일 아침부터 어둑한 어둠이 내릴 때까지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나는 여인숙 비용을 하루라도 더 줄이기 위해 구로공단역 주변과 대림동, 신대방동 근처를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값 싸고 반듯해 보이는 그런 달셋방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간혹 그런 방이 있어도 잠만 자는 그런 방뿐이었다.

서울에서의 하루하루가 그렇게 덧없이 흘러갈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절약을 해도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돈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차비만 달랑 들고 맥없이 고향 앞으로 낙향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여인숙에서의 생활이 5일째에 접어들자 내 호주머니에 있는 돈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달셋방을 구해도 당장 들어갈 처지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대부분의 달셋방은 보증금 명목으로 3개월 치 방세를 미리 걸어야 했고, 한 달 방세도 반드시 선불로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날 오후 나는 2호선 신대방역 주변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달셋방 하나를 눈여겨 보았다. 두 평 남짓한 그 방에는 흙으로 된 조그만 재래식 부엌(연탄을 사용하는)이 하나 딸려 있었고, 마당 한 귀퉁이에는 고만고만한 달셋방에 사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수도가 하나 있었다.

방 안은 흑벽에 벽지를 바른 탓인지 곳곳에 쥐오줌으로 얼룩진 것 같은 벽지가 붕 떠 있었고, 방바닥에 깔린 누런 장판에도 시커먼 담뱃불 흔적이 곳곳에 찍혀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 방은 처음부터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10만 원의 보증금과 한 달 방세 3만 원을 미리 낼 돈도 없었다.

하지만 주인 아주머니는 그런 내 속내를 다 알고 있다는 듯 내 허리를 쿡 찌르며 '보증금 걸 돈이 없으면 한 달 방세만 먼저 내고 들어오라'며 보증금은 한 달 뒤에 방세와 함께 내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라도 당장 내가 잘 수 있게끔 벽지와 장판을 새롭게 깔아주겠다며 은근히 내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여보세요?"
"응, 오랫만이구나. 그래, 서울살이는 할 만하고?"
"그저 그렇습니다."
"건강은?"
"괜찮습니다. 근데 저… 형님한테 어려운 부탁 좀 할 게 있어서요. 이런 부탁을 해도 될런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 알았다. 니가 전화를 걸 때부터 무슨 부탁을 하려는지 다 알고 있다. 통장번호나 불러봐라."

그랬다. 나는 처음 서울에 올라올 때 부모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아예 서울에 있는 큰 공장에 취직이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부산에 있는 세일즈 회사에 잠시 다닐 때 부산 범일동에 얻어두었던 달셋방 보증금을 빼낸 돈 30만 원이 있기 때문에 상경에 필요한 돈이 없어도 된다며 큰소리를 쳤다. 그 돈이 바로 내가 상경할 때 가지고 온 30만 원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상경할 때 부모님으로부터 몫돈을 받지 못했다. 아니, 혹시라도 부모님께서 '서울에서 살아가려면 전세방이라도 하나 얻어야지. 서울은 방 값도 아주 비쌀 텐데'라며 나의 상경을 말릴까봐 아예 돈이 필요없다고 했던 것이었다. 그래야만이 부모님께서 나의 상경을 아주 자연스럽게 인정해 주실 것만 같았다.

근데 형님은 그런 내 속내를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나 저제나 돈 때문에 전화가 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설사 내 말처럼 상경하는 즉시 공장에 다닌다 하더라도 고작 30만원을 가지고 무슨 수로 방을 얻을 것이며, 방을 얻었다 하더라도 당장 한 달 동안 생활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 당장 돈을 조금 보낼 테니까 찾아 써라."
"고맙습니다."
"형제 사이에 고맙다는 그런 말은 하지 마라. 하여튼 객지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돈 아끼지 말고 사 먹어라. 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아둥바둥 거리며 사는 거지, 사는 게 별 게 아니다."

그 날 나는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 근처에서 여인숙보다 더 초라한 달셋방을 얻었다. 그리고 형님께서 보내 주신 돈으로 보증금과 한 달 방세도 미리 냈다. 마침내 나는 일주일 동안의 아찔하고도 불안했던 여인숙 생활을 끝내고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 사는 서울 시민이 될 수 있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2. 2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3. 3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4. 4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5. 5 '검찰 유도신문' 녹음 파일 통했나... "최재영 청탁금지법 기소" 결론 '검찰 유도신문' 녹음 파일 통했나... "최재영 청탁금지법 기소" 결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