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홀씨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이다.박철
참으로 척박한 동네였다. 물을 댈 수 없어서 묵혀 논 논다랑이가 서너 마지기가 있을 뿐 모두 밭뙈기들인데 그것도 헤어진 옷을 깁듯이 여기저기 거의 비탈 밭이었다. 밭농사라야 감자, 고추, 메밀, 사료용 옥수수 등이 전부였다. 교회당은 15평 남짓했고, 담임자 사택은 방이 두 칸에 가운데 부엌이 있는 일자집이었다. 지붕은 달랑 슬레이트만 얹고 반자를 안 해서 여름이면 찜통이었고, 겨울이면 윗목에 놔둔 물이 얼 정도로 추었다. 방이 얼마나 작던지 아내가 시집올 때 갖고 온 장롱을 들여놓았더니 다리를 쭉 펴고 누울 수가 없었다.
6개월 동안 비워둔 집이어서 사람대신 쥐새끼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한밤중 쥐새끼들이 찍찍거리는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이 들 만하면 쥐새끼들이 연애를 하는지 사각사각거리다가 별안간 우당탕하고 뛰어다니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자다가 약이 올라 베개를 냅다 천정을 향해 집어던지면 잠시 조용해진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4년 6개월 동안 쥐새끼들과 같이 살았다.
교회마당 앞에 나가서 '이 아무개야!'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면 다 들릴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인정이 많고 선량했다. 전화도 없었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여름이면 매미가 쩌렁쩌렁 요란하게 울어댄다. 겨울이면 산이 깊어서 밤이 일찍 찾아오고 한없이 고즈넉했다.
나는 그때 강단에서 뭐라고 설교를 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설교랍시고 했을 텐데 지금 생각은 그 시절 전국적으로 데모 열기가 한창이었을 무렵, 나는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그것도 민중의 언어랍시고 그들의 삶과는 전연 무관한 얘기를 토해냈을 것이 뻔하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나의 삶은 거대한 자본주의의 모순과 군사독재정권의 권력남용에 대한 저항으로 일관했기에 어찌 보면 그 시절, 그럴 수밖에 없던 측면도 있었다.
그때 유일하게 내 숨통을 트이게 해준 것이 바로 북산이 육필로 써서 보내준 '민들레교회 이야기'였다. '민들레교회 이야기'는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만들어 준 창문 같았다. 우체부 아저씨가 우편물을 가지고 오면 제일 먼저 민들레교회 이야기'부터 찾았다. 첫 장부터 꼼꼼히 연필로 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내가 다 읽고 나면 그 다음 아내가 읽는다. 두 사람이 다 읽고 나면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철끈으로 묶어 몇 달치를 벽에 걸어둔다. 낮잠을 자고 나서 읽을 때도 있고, 심심해도 읽고, 잠이 안 와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