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포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86>나를 바다에 빠뜨린 그 '포도밭'

등록 2004.08.23 14:21수정 2004.08.2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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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흑진주처럼 알알이 박힌 포도

흑진주처럼 알알이 박힌 포도 ⓒ 이종찬

"포도 한 박스 사 갈까?"
"웬 포도? 그것도 한 박스씩이나?"
"포도 하면 자기뿐만 아니라 푸름이, 빛나도 사족을 못쓰잖아."
"요즈음 비가 자주 와서 포도가 그리 달지 않을 텐데."
"태풍 오기 전에 수확한 거라 아주 달대."


나는 어릴 때부터 포도를 아주 좋아했다. 과일이라면 거의 다 잘 먹었지만 특히 포도는 '포도!'하고 그 이름만 들어도 절로 입에 침이 가득 고일 정도였다.

큰딸 푸름이와 작은딸 빛나도 포도를 참 좋아한다. 오죽했으면 푸름이와 빛나가 첫 돌이 갓 지났을 무렵 내가 포도를 먹고 있으면 쪼르르 기어와 입을 헤 벌린 채 포도를 따먹는 내 손끝 따라 고개를 움직였을까.

나는 포도를 먹을 때 우선 알맹이를 입에 넣은 뒤 포도 껍질을 살짝 씹어 껍질에 고여 있는 향긋하고도 달착지근한 포도물을 쪽쪽 빨아먹었다. 그리고 미끌미끌하고도 보들보들한 포도 알맹이에서 포도씨를 가려 내뱉은 뒤 꿀꺽 삼켰다. 그렇게 먹어야 구슬처럼 알알이 빛나는 포도의 제맛을 느끼는 것만 같았다.

아내는 그런 내게 포도 껍질을 씹지 못하게 했다. 아무리 포도를 잘 씻어도 포도 껍질에 농약이 묻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아내의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포도를 먹을 때마다 포도 껍질을 살짝 씹어 먹었다. 라면의 참맛은 국물에 있고, 포도의 참맛은 포도 껍질에 있다면서.

a 아내가 사온 포도 한 박스

아내가 사온 포도 한 박스 ⓒ 이종찬

a 스무살 시절, 창원 귀산 포도밭에서

스무살 시절, 창원 귀산 포도밭에서 ⓒ 이종찬

푸름이와 빛나는 포도를 나처럼 먹지 않았다. 푸름이와 빛나는 까만 포도 껍질에서 연초록 포도 알맹이만 쏘옥 빼낸 뒤 씨앗도 뱉지 않고 그대로 꿀꺽 삼켰다. 두 딸이 어찌나 포도를 빨리 먹는지 마치 포도 먹기 경쟁을 시켜 놓은 것만 같았다. 아니, 누가 보면 부모가 포도를 얼마나 사 주지 않았으면 저렇게 잘 먹을까 할 정도였다.


"우리 요번 일요일에 배 타고 포도밭에나 가자."
"그거 좋지. 기왕 가는 김에 배 한 척 빌리가(빌려가지고) 줄낚시도 해뿌자."
"내는 포도란 말만 들어도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간다카이."
"그라모 내가 왕복 배삯을 내께. 니는 포도값 내고, 니는 낚시도구하고 묵거리(먹거리) 몽땅 다 챙겨온나."

내가 스무 살에 접어든 그해 여름, 나와 동무들은 아침 일찍 마산 어시장 선착장에 모여 귀산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 당시 창원과 마산 일대를 통틀어 포도밭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곳이 창원 귀산이었다. 마산 앞바다 저만치 마치 고래처럼 웅크리고 떠다니는 귀산은 마산 선착장에서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귀산은 눈에 띄는 곳이 모두 포도밭이었으며, 포도뿐만 아니라 바닷물도 맑고 낚시도 아주 잘 되었다. 바닷물에 낚싯줄을 드리우기만 하면 이내 손바닥만한 도다리와 물뱀처럼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장어, 꼬시락 등이 숨 돌릴 틈 없이 올라오곤 했다. 간혹 복어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복어는 고기 취급을 하지 않았다.

그날, 마산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30여분 남짓 걸려 귀산에 도착한 우리들은 우선 포도밭으로 들어갔다. 보이는 곳마다 까만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린 그 포도밭에는 조그만 원두막이 하나 있었다. 그 원두막은 늘상 포도밭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포도를 먹는 장소이자 수확한 포도를 모양과 크기, 무게에 따라 골라내는 곳이기도 했다.

a 그 많던 포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많던 포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이종찬

a 그 당시 귀산 앞바다에는 낚싯줄만 내리면 도다리, 장어 등이 자주 올라왔다.

그 당시 귀산 앞바다에는 낚싯줄만 내리면 도다리, 장어 등이 자주 올라왔다. ⓒ 이종찬

우리들은 우선 포도밭 주인에게 포도를 시킨 뒤 포도밭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흑진주처럼 알알이 박힌 까아만 포도와 청포도, 머루포도를 따먹기 시작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포도밭에 가서 포도를 사면 주인이 손님들에게 먹고 싶은 포도를 마음껏 따먹게 했다. 그리고 재수가 좋으면 포도밭 주인이 직접 담근 아주 오래된 포도주도 맛 볼 수 있었다.

"이야! 머루포도 이 거는 포도가 아이라 고마 꿀이다, 꿀!"
"우리 이라다가(이러다가) 포도로 배 채우는 거 아이가."
"아무리 술을 많이 묵어도 밥배가 따로 있듯이 포도배도 따로 있는 기라."
"인자 포도는 고마 따묵고(따먹고) 낚시나 하로(하러) 가자. 이래 자꾸 포도를 따묵다가는 포도밭 주인 솥단지까지 엎어지것다."

하지만 포도밭 주인은 빙그시 웃으며 더 따 먹어라고 했다. 그날 우리들은 손가락 마디마디에 포도물이 벌겋게 물들 때까지 포도를 정말 많이 따먹었다. 배가 너무 불러 점심까지도 거를 정도로. 그리고 포도밭 주인이 "이거는 억수로 오래 된 깁니더"라며 싸 주는 포도주 한 병과 포도를 들고 귀산 앞바다로 나왔다.

귀산 앞바다 근처에서 노 젓는 나룻배를 한 척 빌린 우리들은 배를 타고 귀산 앞바다 중간쯤에 닻을 내린 뒤 줄낚시를 하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그대로 낚시는 정말 잘 되었다. 낚시줄을 바닷물에 빠뜨리기 무섭게 도다리와 장어가 올라 왔다. 우리들은 낚은 물고기들을 그 자리에서 회를 뜨서 초장에 맛나게 찍어 먹었다.

그렇게 물고기가 줄줄이 계속 낚인다면 낚은 물고기를 횟집에 팔아도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 시간쯤 지나자 물고기가 낚이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입질마저도 없었다. 갑자기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속 흔들리는 나룻배에 있다 보니 어지럼증이 나면서 가끔 헛구역질이 올라오기도 했다.

a 나는 그 동무를 바다에 빠뜨리기 위해 노를 힘차게 저어 뱃머리를 급히 돌렸다

나는 그 동무를 바다에 빠뜨리기 위해 노를 힘차게 저어 뱃머리를 급히 돌렸다 ⓒ 이종찬

a 하지만 내가 그만 바다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그만 바다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 이종찬

"인자 낚시도 안 되고 한께네 고마 슬슬 나가자. 잘못하다가 배 시간 놓칠라."
"안주(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거마는."
"노 저어서 나가는 시간도 생각해야 안 되것나. 그라고 조금 있으모 썰물인께네 노 젓는 것도 아까 하고는 영 다를 낀데."

오후 3시쯤이었을까. 나는 닻을 올리고 나룻배를 서서히 귀산 부둣가 근처로 저어가기 시작했다. 나룻배가 마악 귀산 바다의 바닥이 보일 정도에 왔을 때 문득 장난끼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뱃머리에 아슬아슬하게 앉아, 그때까지도 포도에 미련을 못 버린 듯 포도를 먹고 있는 동무 한 명을 바다에 빠뜨리고 싶었다.

나는 슬며시 노를 바닷가 바닥에 댄 뒤 갑자기 뱃머리를 심하게 틀었다. 순식간에 배가 기우뚱하면서 배에 탄 동무들이 배 안에 쓰러지면서 "야! 배로 우째 모노?"하며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뱃머리에 앉아 있던 동무의 손에 들린 포도송이도 바다에 툭 떨어졌다. "아까운 포도를 바다에 왜 버려? 빨리 건져"하면서 나는 다시 한번 뱃머리를 심하게 틀었다. 그 동무가 포도를 건지려는 그때를 노려 바다에 빠뜨릴 생각이었다.

근데, 그 순간 나는 순식간에 노를 놓치고 말았다. 갑자기 몸이 기우뚱했다. "어어어어~"하며 중심을 잡으려던 나는 그만 바다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뱃머리에 있는 동무를 바다에 빠뜨리려고 용을 쓰다가 그만 내가 보기 좋게 바다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뱃머리에 앉은 그 동무가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킥킥킥! 큭큭큭!"
"어이! 기왕 물에 빠진 김에 내 포도도 좀 건져 도라(건져 줘)."
"그라이 나쁜 맴(마음)을 묵으모(먹으면) 하늘이 벌로 내리는 기라."

a 피로 회복에 좋은 포도 드세요

피로 회복에 좋은 포도 드세요 ⓒ 이종찬

그래. 지금도 나는 까아만 포도송이를 바라보면 그때 그 귀산 앞바다가 떠오른다. 그때 그 동무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차라리 그때처럼 내가 바다에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한번 그때 그 동무들과 어울려 배를 타고 귀산 포도밭에 가고 싶다. 가서 그때처럼 포도를 안주 삼아 포도주를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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