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곤장이 영어로 뭐지?"

전남 담양연수원에서 보내는 편지(2)

등록 2004.09.19 23:31수정 2004.09.20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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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선생님!

또 한 주가 지났습니다.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저는 물을 마시러 샘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기를 좋아하는 '어린 왕자'처럼 기분 좋은 갈증을 느끼며 하루하루 잘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연수를 받으면서 영어교사로서 느끼는 일종의 결핍감은 저를 낙담하게 하거나 좌절감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족하기에 더 많은 것을 원하게 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저를 이끌고 있습니다.

때로는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제 자신을 몰아넣기도 합니다. 이번 연수생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대표를 맡게 되었는데, 영어로만 의사소통을 해야하는 상황이라 불편한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굳이 사양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짧은 영어 실력을 감추려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괴롭고 불편한 상황으로 저를 몰아감으로써 그곳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a 용인 민속촌에서

용인 민속촌에서 ⓒ 안준철

지난주에는 용인민속촌과 서울, 공주 등을 여행하며 2박 3일 동안 현장실습(field trip)을 다녀왔습니다. 처음에는 멀리 여행을 떠난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조차 했는데 여행지에 도착하기 전 버스 속에서 반별로 지정된 여행지를 안내해야 하고, 여행지에 도착하면 원어민을 상대로 관광가이드 역할을 해야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일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인터넷에 들어가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고 그 내용을 일일이 수첩에 적으면서 웬만큼 문장을 외우고 나자 비로소 마음의 불편함이 즐거운 갈증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때는 이미 날이 환하게 밝아오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드디어 현장 실습 첫날, 저는 용인 민속촌에서 원어민 담임 교사에게 조선시대 북부지역 농민들이 살았던 주거형태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 녹슨 머리에 입력시키기에는 조금 버거웠던 어려운 전문 용어들도 자연스럽게 섞어가며 열심히 가이드를 하다가 저는 문득 전과는 사뭇 달라진 제 자신의 모습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에겐 정말 값지고 기분 좋은 경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a 용인 민속촌에서

용인 민속촌에서 ⓒ 안준철

실습 중에 좀 난처한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의 관청이었던 관아에 들어가 "아, 오늘 영어가 왜 이렇게 잘 되지?" 하고 스스로 감탄하며 신이 나서 가이드 노릇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웬 한 아이가 형틀에 엎드려 있고 다른 한 아이는 곤장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이들은 장남 삼아 그런 짓을 했겠지만 호기심이 많은 외국인에게 그 광경을 설명해주는 일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어! 곤장이 영어로 뭐지?"


순간, 저는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전자 사전에 손이 갔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꺼내어 단어를 찾아보는 것이 어딘지 궁색한 기분이 들어서 곤장은 빼고 죄인, 형벌, 치다 등의 단어만으로 문장을 만들 생각을 하다가 그것도 귀찮아서 그냥 이렇게 말해버렸습니다.

"Hit the bad man."


'죄인에게 일종의 형벌로서 곤장을 치고 있다'는 말을 영어로 제대로 번역하려다가 포기하고 간단하게 '나쁜 사람을 때린다' 라고 해버린 것이지요. 다행히도 제 담임 교사인 Rodney는 충분히 이해를 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하나의 발전이었습니다. 물론 이후에 누군가 저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좀 더 유창한 대답을 할 수도 있겠지요. 이 날의 시행착오를 통해서 말입니다.

실습 두 번째 날, 우리는 <아리랑 TV>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영어방송인 Isaac을 만나 함께 사진을 찍은 것도 상당한 행운이었지만, 막 방송을 끝낸 여성 뉴스 진행자와 당당하게 대화를 나누고 너무 긴장하지 말라는 뜻으로 마치 제자에게 하듯 격려의 악수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생각해도 대단한 발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a 아리랑 TV에서 아이작과 함께

아리랑 TV에서 아이작과 함께 ⓒ 안준철

그 날 아리랑 TV 견학은 4개 반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우리 반은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몸에 배인 듯한 조성흠 부장(아리랑 TV 제작기술팀장)께서 직접 안내를 맡아주어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부조종실 모니터를 통해 생방송 1분 전의 긴박하고 분주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학교에서의 나의 노동은 저 사람들만 할까?" 하는 엉뚱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기도 했습니다.

윤 선생님!

토요일은 쉬는 날이어서 학교에 가보았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그 아이를 만나 영어 알파벳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공부를 하기로 약속만 하고 제가 담양으로 오는 바람에 기회를 갖지 못했는데 오늘은 1학년이 수련회를 떠나고 없어서 또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좀 더 성실한 교사였다면 학기초에 웬만한 영어 기초를 끝내줄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하여 아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 담양 연수원에 있는 동안 저는 좀 더 아이들에게 미안해지려고 합니다. 인터넷만 접속하면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수업을 하면서 실력을 쌓아갈 수 있는 수많은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고백하자면 솔직히 그런 훌륭한 자료가 있는 줄조차도 몰랐습니다) 딱딱한 교과서만 가지고 재미없는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만 닦달한 죄를 어떻게 용서받아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보충수업이나 특기적성시간에도 학생들의 언어소통 능력을 키워줄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적절한 교수법을 개발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수능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참고서 한 권을 정하여 손쉽게 문제풀이나 해주고 말았던 지난 시간들이 너무 아쉽고 죄스러운 마음까지 듭니다.

물론 학교 현장의 입시위주 교육의 틀이 깨지지 않는 한 개인교사의 각성과 노력이 교육발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밤늦도록 비좁은 교실에 가두고 아이들을 감시하는 것 외에는 이 땅의 꿈나무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것이 없는 이 참담한 현실을 핑계삼아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그런 현실을 더욱 가파르게 한 사람이 바로 '나'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든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것은 어차피 우리 아이들이라는 사실이지요. 어마어마한 돌에 깔려 신음하고 있는 아이를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상대에게 그 잘못을 전가하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그런 어처구니없고 답답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윤 선생님!

오늘은 여기서 편지를 맺을까 합니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선생님도 아이들과 함께 '나름대로' 결실을 맺는 좋은 계절이 되시길 빌겠습니다. 저도 이곳 담양에서 '나름대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성의를 다할 생각입니다. 어떤 두려움보다는 기분좋은 갈증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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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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