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영어가 필요 없는데요..."

전남 담양 연수원에서 쓰는 편지(1)

등록 2004.09.13 07:00수정 2004.09.17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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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담양 연수원 앞길

담양 연수원 앞길 ⓒ 안준철

윤 선생님.

막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편지를 씁니다. 저는 지금 대나무로 유명한 전남 담양에 와 있습니다. 혹시 담양 소쇄원을 아시는지요? 이조 중엽 개혁 정치가인 조광조가 죽자 그의 제자인 양산보가 살림집이 딸린 정원을 지어 살았는데 그 정원 이름이 소쇄원이지요.

바로 그 근처에 자리 잡은 전남 교육연수원에서 한 달 동안 8명의 원어민(Native Speaker)들과 30여명의 영어 교사들이 숙식을 함께 하며 영어에 흠뻑 빠져 보는 JLP(전라남도 외국어교육 프로그램) 영어교사 합숙 직무 연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담양 연수원 안에 있는 JLP 센터 영어 전용 구역(English Only Zone)에서 24시간 "영어로 생각하고(think in English), 영어로 말하며(speak in English), 영어로 꿈을 꾸자(Dream in English)"는 야무진 목표 아래 진땀을 흘리고 있지요. 아직 영어로 꿈을 꿔 보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그런 희한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동안 시인이랍시고 많은 시간을 모국어로 시를 짓고 글을 쓰는 일에 바치다 보니 정작 영어 교사로서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하여, 이른 가을 풍광이 빼어난 이곳에 와서 단 한 편의 시도 읽지(쓰기는 고사하고)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부정한 여인을 멀리하듯 시를 멀리 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만, 산책길에 들꽃 몇 송이를 꺾어 와 컵에 담아 황량한 교실 창가에 놓아둔다는지, 제가 이전에 쓴 시를 영어로 번역하여 원어민이나 동료 선생님들에게 보여 준다든지, 아니면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나 김춘수 시인의 <꽃>과 같은 시를 영역하여 교실 게시판에 붙여 둔다든지 하는 것으로 이 가을에 시를 멀리해야만 하는 심정을 스스로 달래고 있습니다.

a 담양 소쇄원에서

담양 소쇄원에서 ⓒ 안준철

이곳에 와서 아침마다 소쇄원까지 산책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 되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찾아 보니 소쇄원(瀟灑園)의 '瀟'는 '빗소리 소', 혹은 '물 맑고 깊을 소'이고, '灑'는 '물 뿌릴 쇄'나 '깨끗할 쇄'라는 뜻을 가지고 있더군요. 결국 소쇄원의 이름을 풀어쓴다면 '물 맑고 시원하며, 깨끗한 원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아침마다 이곳으로 산책을 나오면 정말 속세를 떠난 느낌이 듭니다.


속세를 떠난 느낌이 드는 것은 영어 전용 구역에 돌아와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만에 가르치는 입장에서 배우는 입장이 되어 오로지 영어를 배우고 말하는 한 가지에만 몰두하여 생활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서너달만 더 있을 수 있다면 뭔가 끝장을 볼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수업 중에 가끔 학교 아이들 생각을 합니다. 원어민들도 교사로서의 성실함이랄까 능력이랄까 하는 것이 다 같을 수는 없어서 쉬는 시간이면 가끔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하지요. 그러다가 문득 우리 아이들도 그랬겠다 싶을 때는 가슴이 뜨끔해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사려 깊은 교사라도 해도 학생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교사의 연수가 갖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하겠습니다.


이곳에 와서 특별히 생각나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수업시간마다 진지하게 저를 바라보곤 하는 몇 안 되는 아이였는데 어느 날 쪽지 시험에서 백지를 내 저를 당황하게 한 아이기도 합니다. 무슨 문제가 있으려니 하고 쉽게 생각하고 곧 잊고 말았는데 그 다음 쪽지 시험을 볼 때도 마찬가지로 백지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영어 알파벳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종의 학습 부진아였습니다. 그날은 5분 가량 단어를 외울 시간을 주고 쪽지 시험을 보았는데 그 아이는 단어를 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화가 나기도 하고,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도 있고 해서 조금은 감정이 섞인 어조를 말을 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열심히 외우고 있는데 넌 왜 멍하니 앉아 있는 거냐?"
"해도 잘 안 되는데요."
"잘 안되다니? 네가 노력을 안 하니까 그렇지. 나하고 내기할까? 되는지 안 되는지?"

그리고는 단어를 하나씩 불러 주고 외워서 쓸 수 있도록 해 줄 요량으로 저는 자신감 있게 단어 하나를 불러 주고 쓰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영어 알파벳 'r'을 받아 적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잠깐 아득한 나락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습니다. 학기 초도 아니고 벌써 9월로 접어든 때여서 아이의 학습 상태를 파악하지 못한 제 자신에 대한 반성이 더 컸지요.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너 영어 알파벳을 제대로 안 배운 모양이구나. 그거 금방 배울 수 있어. 언제 시간 내서 배우도록 하자."
"전 영어가 필요 없는데요."
"영어가 필요 없다니? 그런 말이 어딨어? 네가 귀찮아서 그런 거지. 언제 시간을 내보자."
"저 시간이 없는데요. 학교 끝나면 바로 도장에 가야 하거든요."
"너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냐?"
"예?"

아이는 조금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악의나 저의가 없는 순한 눈빛이었기에 저는 순간적이나마 그 아이에게 발끈했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영어가 필요 없다고 느꼈기에 그렇게 말한 것뿐인데 제가 괜한 감정을 품었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저는 며칠 뒤에 그 아이를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 나이가 오십이야. 그래도 어떤 판단을 하면 그것이 틀릴 때도 많아. 어떤 일이 내게 필요한 것인지 필요가 없는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더라. 넌 나보다 나이가 어리니까 조금은 더 하겠지? 지금은 필요가 없는 일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필요할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미리 준비해 두지 않으면 그때는 이미 늦어버리거든. 그럼 어떻게 할까? 지금 판단하기 어려운 것을 하고 안하고를 어떻게 정하면 좋을까? 이렇게 하면 어떻겠니? 네가 평소에 믿고 존경하는 어른이나 선배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해 보는 거야. 물론 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좋겠지?"

고맙게도 그 아이는 제가 하는 말뜻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습니다. 저는 적이 안심을 하고 다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난 널 사랑하는데 네가 날 믿고 존경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구나. 만약 선생님을 믿는다면 내 말에 따라 주면 좋겠다. 어때? 내일부터 나랑 영어 알파벳 공부를 할까 말까?"
"예. 하겠습니다."

윤 선생님.

오늘 편지는 여기까지입니다. 솔직히 이곳에서 시간을 내기가 어렵거든요. 다음에 이어서 편지를 드리겠습니다. 대신, 제가 교실 게시판에 붙여 놓은 자작시를 한 편 보내드리지요. 제가 이곳에서 받은 양질의 교육으로 저 혼자만 풍성해지는 일이 없도록,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라나 더러 기초가 부족한 아이들에게도 그 혜택이 고스란히 돌아갈 수 있기를 비는 마음을 담아서 말입니다.

Getting into profoundness

Going to a winter mountain
Which has lost its colors
And has left just a lifeless sketch
I learn how to live without fascination.
The trees standing as a part of forest
After having cast all leaves
The infinite space hangs down
Every sites of becoming leafless.
Getting into profoundness, I guess
Is not making his thick foliage by himself
But letting others see remote things
As I look at, by casting his own foliage.
As Korosei trees of Cho-gye mountain
Hanging some bottles like a urinal tub
At a turning to the mountain track
Getting into profoundness, I guess
Is once more waiting for another cold day
In order to give someone curable water.

깊어진다는 것은

색채를 잃고
밑그림으로만 남아 있는
겨울산에 와서
도취 없이 생을 사는 법을 배운다.
잎 다 떨구고 비로소
숲이 되어 서 있는 나무들
잎 진 자리마다
무한 허공이 달려 있다.
깊어진다는 것은
홀로 무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저렇듯, 제 잎을 지워
멀리 있는 것들을 보여 주는 것이리.
산길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오줌통 같은 병을 매달고 서 있던
조계산 고로쇠나무들처럼
깊어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약수를 내어주기 위해
한 번 더 추워질 날을 기다리는 것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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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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