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35) 기다리는 마음

등록 2004.09.27 00:51수정 2004.09.2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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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의 플래카드


a 마을 어귀에 걸린 플래카드

마을 어귀에 걸린 플래카드 ⓒ 박도

"고향에 오심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추석 명절에 고향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고향은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마을 어귀에 내걸린 플래카드의 글구들이다. 팔월 한가윗날을 앞두고 바야흐로 민족이 대이동하는 추석 전날이다.

가윗날, 추석은 우리나라에서 일년 중 가장 큰 명절이다. 이때는 오곡백과가 익는 계절인 만큼 모든 것이 풍성하다. 또 즐거운 놀이로 밤낮을 지내므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라는 말이 생겨났다.

얼마 전 들에서 일하는 농사꾼과 밭둑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마침 그 분은 고추를 따고 있었는데 잘 말려뒀다가 다가오는 추석 때 자식들이 오면 차에 실어 보낼 거라고 했다.

동네의 또 다른 집에서는 호박도 따고 밤도 따고 옥수수도 콩도 거둬들여서 알곡을 장만했다. 모두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 추석에 오면 주려고 그동안 바쁜 일손을 놀렸다.


나도 그제 고구마를 캤다. 제수용 부침개 감으로도 쓰고, 아이들이 돌아갈 때 주려고 고구마 줄기를 낫으로 걷고 삽과 호미로 캤다. 삽으로 두둑을 파헤칠 때마다 주먹보다 더 큰 고구마가 나왔다. 그때는 마치 낚시꾼들이 월척을 낚는 손맛이나 다름없었다.

갑자기 그 손맛을 아이에게도 맛보게 하고 싶어서 몇 고랑 남겨 두었다. 이른 봄 아들 녀석이 고구마 두둑에 비닐을 덮어줬으니 추석 때 오면 저도 수확하는 기쁨을 맛보게 해야겠다는 아비의 헤아림 때문이었다.


그리고 딸아이를 위해서는 아궁이 땔감을 마련했다. 마침 지난 여름 뒷산 어귀에 누군가 참나무 몇 그루를 쓰러트려 놓은 게 있어서 그것을 끌어다가 땔감으로 쓰고자 톱으로 잘라 두었다. 여기서 지내는 며칠 동안 따끈한 온돌방에서 푹 쉬어갔으면 좋겠다.

대목장 풍경

a 추석 대목장 풍경

추석 대목장 풍경 ⓒ 박도

오늘 아침, 아내가 횡성 장에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대목장이라고 여느 때보다 사람들이 곱절은 더 붐볐다. 과일가게로, 생선가게로, 강정가게로, 건어물가게로… 장터를 두세 바퀴 돌면서 제수를 마련했다. 50년 전 어린시절로 돌아가 장터 노점에 앉아 감자 부침개를 사먹기도 하고, 즉석 튀김도 사먹었다.

내 어린시절, 그때는 추석과 설을 엄청 기다렸다. 그래야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새 옷을 얻어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새 신발에, 양말 한 켤레에도 엄청 행복했던 그 시절이었다.

시골 장터에는 여태 인정과 낭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장사꾼과 장꾼 사이의 주고받는 대화와 덤이다. 추석 대목이라 싸게 판다는 판에 박은 장사꾼 거짓말을 장꾼은 곧이곧대로 들으면서 한 줌 더 주는 덤에 흐뭇해한다. 무슨 무슨 현대식 마트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재래시장만의 풍경이다.

a 제수에 빠지지 않는 어물을 사는 장꾼들

제수에 빠지지 않는 어물을 사는 장꾼들 ⓒ 박도



a 아무리 빈약한 젯상에도 꼭 놓이는 밤 대추

아무리 빈약한 젯상에도 꼭 놓이는 밤 대추 ⓒ 박도



기다리는 마음

누군가 사람은 일생동안 기다리며 산다고 했다. 어려서는 일터에 간 부모를, 결혼 후에는 지아비 지어미를, 늙어서는 자식을 기다리며 산다고 했다. 나도 이제 자식을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 때가 되었나 보다. 기다리는 삶은 그래도 행복하다.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시골에 사는 부모들은 일년 내내 지어놓은 농산물을 마련하고서 객지에 나간 자식들을 기다리고 있다. 명절이 되면 도시에 사는 자식들은 길이 막혀도 마다하지 않고 고향의 부모를 찾고 있다.

하지만 고향에서 부모가 기다리는 줄 알면서도 찾아가지 못하는 자식도 많을 게다. 초라한 몰골을 보이기 싫어서, 부모에게 빈손으로 갈 수 없어서…. 그러나 부모의 마음은 그런 자식을 더 기다린다.

a 귀향객을 반기는 현수막

귀향객을 반기는 현수막 ⓒ 박도

이번 한가윗날에는 모두 다 만나는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설혹 고향을 찾지 못한 자식도 부모에게 전화 한 통이라도 주고받으면서 다음 명절에는 꼭 만났으면 좋겠다.

갑자기 '솔베지의 노래'가 듣고 싶다. 내 아이들도 다른 귀성객들도 모두 편안히 오가기를 빌면서….

a 콩나물도 덩달아 대목을 보고 있다

콩나물도 덩달아 대목을 보고 있다 ⓒ 박도



a 집에 두고온 손자 손녀 몸에 맞을까 눈대중을 하는 할머니들

집에 두고온 손자 손녀 몸에 맞을까 눈대중을 하는 할머니들 ⓒ 박도



a 골라잡아 5,000원, 이 신발을 신은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골라잡아 5,000원, 이 신발을 신은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 박도



a 강정집 아저씨도 눈코 뜰 새 없다

강정집 아저씨도 눈코 뜰 새 없다 ⓒ 박도



a 한 무더기 1,000원, 할머니도 대목장을 보고자 온갖 푸성귀를 다 가지고 오셨다

한 무더기 1,000원, 할머니도 대목장을 보고자 온갖 푸성귀를 다 가지고 오셨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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