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소설] 호랑이 이야기 83

일월궁전의 도영이와 순덕이

등록 2004.10.07 20:31수정 2004.10.08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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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궁전의 동산을 지나 가면 나오는 구름벌판에 여자아이 하나가 앉아 있었습니다. 하늘 색깔처럼 새파란 저고리에 보랏빛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치마를 입은 그 계집아이는 저 아래를 바라보며 턱을 괴고 앉아 있었습니다.

여자아이가 앉아 있는 곳에는 누군가 구멍을 뚫어 놓았는지 구름구멍이 커다랗게 나있었습니다. 그 구름구멍 가장자리에 다리를 내려뜨리고는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는 것처럼 열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설이 시작되려는 마을은, 예전 같으면 이것 저것 분주할 텐데 이번에는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햇님과 달님을 두레박으로 내려다 주면서 아래를 보고 있으면 설이 다가올 즈음에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전부 모여서 떡을 하거나 설빔을 만들고 차례상을 차리느라 부산하게 움직이곤 했습니다.

요즘은 그런 부산한 분위기가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설이 가까워 오면 저 아래 사람들은 언제나 들뜨고 설레는 마음으로 바쁘게 돌아다니곤 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그 설의 부산함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설을 앞두고 저렇게 세상이 컴컴한 적이 없었습니다.

작은 남자애가 하나 타박타박 걸어오더니 그 여자아이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습니다.

“오늘도 여기 나와서 보고 있는거야? 저 아랜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보이잖아, 오늘은 달님도 나가지 않는 날이야, 바람궁전에서 우리 엄마가 구름을 몰고 가셨단 말이야. 아라 선녀님이 알면 우리 혼나, 얼른 가자.”

계집아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물었습니다.


“오빠, 올해는 설이 없어?”

오빠인 듯한 남자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설이 없다니, 무슨 말이야?”

여자아이는 여전히 아래 마을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올해는 설날을 도둑 맞은 것 같애, 저 아래를 봐도 사람들이 아무도 설 준비를 하지 않아. 떡도 안 하고, 고향에 가는 사람들도 없고, 너무 이상해, 아무도 새해가 오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 같지 않아, 아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새해가 없어져 버린 거 아닐까?”

“바보 같은 소리 마. 설날을 누가 훔쳐가니? 아무리 솜씨 좋은 도둑이라고 해도 설날을 훔쳐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사람들 집에 가보면 일년의 숫자가 다 적힌 달력이라는 것이 있대, 누가 한꺼번에 그 달력의 날짜를 바꾸어 버린다면 모를까. 그래도 사람들은 다 알아. 섣달엔 31일 밖에 없으니까. 그때가 지나면 다 새해 맞을 준비를 한다구. 32일이 나오면 전부 그 달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오늘은 엄마가 구름을 몰고 나가셨으니까 아랫 마을을 아무리 보아도 소용 없을 걸.”

여자아이는 여전히 입을 삐죽이며 말했습니다.

“그래도 뭔가 이상해. 오빠는 바보야. 아무것도 모르구. 오빠는 저 아래 한번 쳐다보는 일도 없잖아. 저 아래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애.”

오빠는 누이의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아서 누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바람궁전에 계시는 어머니가 몰고 나간 구름떼들은 다른 곳에 있는지 그 아래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을이 여러 개 보였지만, 불이 켜진 집은 많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 정말 이상하다.”

오빠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습니다. 계집아이는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는 어딘가를 향해 손짓을 했습니다.

“오빠, 저기 좀 봐, 우리가 살았던 곳이야.”

여자아이가 가리킨 곳은 높은 산들이 계속 이어져 있었습니다. 오빠가 말했습니다.

“그래, 큰 집들이 생기고 차들이 다니는 길이 생겨도 우리가 살던 곳은 여전히 그대로야, 저 아래 수수밭도 보인다.”

“저 아래 떨어져 죽은 그 호랑이는 어떻게 됐을까? 분명히 죽었겠지?”

“글쎄, 이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으니…. 저 수수밭에 가면 알 수 있겠는데. 곧 엄마가 구름을 몰고 바람궁전으로 들어가실 때가 됐는데. 그때 엄마한테 한번 물어볼까?”

“엄마가 언제 오는데? 지난 번처럼 저기 산 너머 어디 가셨다가 또 못 오시는거 아니야?”

오빠가 이를 보이며 깔깔 대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하하. 그런 일은 없어, 구름이 하도 거칠어서 어디 산 곁에 잠시 묶어두고 쉬었다 오실 수도 있어, 설마 여기 일월궁전하고 바람궁전에도 호랑이들이 살고 있을 것 같애? 호랑이들은 이곳에 못 올라와, 호랑이들이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여길 날아오겠어. 그리고 아무리 호랑이들이 이곳에 온다고 해도 우리 엄마가 부는 바람 한점이면 전부 저리로 날아가 버릴 거야.”

그때 저 아래로 구름 무더기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오빠가 그 구름 무더기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기 봐, 우리 엄마가 오신다. 보이지?”

계집아이는 말이 없었습니다. 분명 저 아래 구름이 움직이고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움직이고 있는 구름들은 엄마가 바람궁전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구름들 같아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아까부터 검은 하늘을 왔다갔다 하던 이상한 구름이었던 것입니다.

“오빠, 저 구름은 엄마가 몰고 오시는 구름이 아니야.”

“그럼 뭐야.”

“저기 봐, 오빠. 저 구름은 바람궁전으로 가는 것이 아니야, 저건 땅에서 올라오고 있는 구름이야.”

“뭐라구?”

오빠는 놀라 아래를 쳐다보았습니다. 동생 말이 맞았습니다. 그것은 바람궁전을 향해 가고 있는 구름떼가 아니었습니다. 일월궁전으로 올라올 양인지 구름 하나가 땅에서 하늘로 빠르게 솟아오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람 궁전에 몇 년간 한번도 들어온 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색깔도 거무튀튀한 것이 아주 이상했습니다.

도영이는 순간 그 검은 구름 위로 무언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좀더 가까이 보기 위해 고개를 더 아래로 내밀고 있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도영아, 순덕아. 너희들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게야, 한참을 찾았잖아.”

아라 선녀가 바쁘게 두 아이를 찾아내어 말했습니다. 오빠가 선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아라 선녀님, 저 아래 우리 엄마가 구름을 몰고 오실 때가 되었는데, 무슨 이상한 구름 하나가 땅에서 올라오면서 길을 막고 있어요. 한번 보세요.”

선녀는 아래를 내려다 보지도 않고 구름을 향해 손바닥을 한두번 휘저었습니다. 그러자 아래에 있던 구름구멍이 없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선녀가 말했습니다.

“내가 구름구멍 아래로 함부로 바라보지 말라고 했잖니. 오늘 이 구름구멍은 누가 만들었지?”

여자아이가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제가 햇님을 두레박으로 올리고 잠시 놀러나왔는데 본 거에요, 제가 만들지 않았어요, 그리고 구름벌판 여기저기에 이런 구름구멍이 뚫린게 많아요, 저기도 한번 보세요.”

선녀가 주위를 둘러보니 하얀 구름 벌판 위에 군데 군데 꺼멓게 구멍이 뚫린 곳이 많았습니다. 분명 설날이 가까와서 섣달 29일에 조왕신이 하늘나라에 올라오실 때가 되면 구름들을 다 제자리에 모아두기 마련인데, 바람궁전에서 일을 게을리하고 있는 것처럼 저렇게 구름구멍들이 많이 보이고 있었습니다.

여자아이가 선녀에게 말했습니다.

“일부러 보려던게 아니에요. 그런데 요즘 저 아래는 너무 이상해 졌어요, 마치 올해는 설이 오지 않을 것 같애요.”

선녀가 다시 손사래를 치며 말했습니다.

“순덕아, 염려하지 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이제 곧 해를 보낼 준비를 해야지, 여기 이렇게 오빠랑 둘이서만 놀고 있으면 어떡하니. 오늘 귀한 손님이 오시는 날이란 말이야.”

순덕이가 말했습니다.

“귀한 손님이요? 조왕신님이 오늘 오시지요?”

아라 선녀가 날아갈 채비를 하면서 말했습니다.

“그래, 하지만 조왕신 말고도 다른 손님이 우리 일월궁전을 찾아온단다, 얼른 가자.”

선녀와 두 아이는 날개옷을 입고 구름 벌판 위를 날아올라서 다른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향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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