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들녘을 천천히 걷다

<포토> 제주의 가을

등록 2004.10.08 11:02수정 2004.10.08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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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구름에 둘러싸인 한라산-서귀포에서 바라본 풍경 ⓒ 김민수

신의 정원 한라산, 백록이 뛰어 놀았다던 백롬담을 구름이 껴안고 있다. 제주의 가을은 여느 육지의 가을과는 달라서 황금빛 들녘보다도 억새의 은빛들녘이 더 빛을 발하고, 뜨거운 여름 파종했던 감자와 당근, 각종 채소들이 푸릇푸릇 들녘에 솟아나 봄의 푸른빛도 간직하고 있다.

여러 계절이 혼재해 있는 듯한 풍경이 이국적이라고나 할까? 떠나는 계절이 아쉬워 가을이라는 풍경을 오래 붙잡고 싶거나 아니면 새봄을 미리 보고 싶다면 제주의 돌담 사이로 난 사잇길이나 은빛물결 출렁이는 억새밭이나 가을꽃이 핀 들판을 천천히 걸으며 육지에는 이미 흐드러지게 피었을 가을꽃들이 막 꽃몽우리를 내미는 모습들을 바라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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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주군 북촌리의 다려도라는 섬에 있는 정자 ⓒ 김민수

바다는 에메랄드빛 혹은 검푸른 색이다. 높아진 가을 하늘만큼이나 깊어진 듯한 바다의 쪽빛은 그 높은 하늘을 담으려 더 넓어진 듯 수평선은 하늘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분명한 선을 긋는다. 섬에서 바라보는 올망졸망한 또 다른 섬들을 보는 맛도 남다르다.

섬사람들에게 있어서 바다는 어머니다. 그 안에 생명이 들어 있고, 그 안에 삶이 배어 있다. 한 겨울에도 햇살만 따사롭고 태풍만 오지 않으면 해녀들의 물질을 볼 수 있는 곳, 깊게 참아왔던 숨을 내뱉는 소리가 '휘익!' 들려올 때면 그들의 손에는 소라와 성게와 전복, 미역, 톳이 들려 있다. 풍족하지 않아도 그것을 팔아 자식새끼들 공부시키고 건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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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좌읍 종달리의 밭벼 ⓒ 김민수

척박한 제주의 동쪽 땅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밭벼는 낯선 풍경이다. 조금만 더 따가운 가을햇살이 비춰주었으면 좋겠는데,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잔뜩 찌푸린 가을하늘을 이고 있는 밭벼도 무럭무럭 익어가겠지.

종달리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평생을 살아온 촌로의 이야기다.

"옛날에는 소나 말로 밭을 갈았으니 그저 조, 보리, 유채 정도 심어 먹었고, 억새를 베어다가 지붕을 잇는 정도였지. 지금 중산간 쪽으로 있는 밭에 당근이나 감자를 심어 먹을 수 있었던 것이 그리 오래 된 것이 아니여. 농기구들 덕분에 그나마 돌을 골라내고 밭으로 개간을 한 것이지. 우리 밭은 동네에 있어도 돌이 많아서 조나 콩 같은 것밖에 심지 못하거든."

지금도 그렇지만 그 옛날 얼마나 척박한 땅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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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눈이 오름 근처의 억새밭 ⓒ 김민수

지금이야 은빛물결의 장관을 이루는 억새가 관광상품이 되어 제주의 가을을 상징하는 것처럼 되었지만 옛날에는 이맘때면 집집마다 억새를 베어 가축도 먹이고 지붕도 이었을 것이다. 제주는 벼농사가 많지 않아 볏짚이 많지 않았으니 억새로 지붕을 이었을 것이고 이런 저런 생활용품들도 만들어 사용을 했을 것이다.

은빛 물결. 물이라는 것이 그렇게 우리를 유혹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 깊지 않은 듯한데 억새 밭에 들어서면 키를 훌쩍 넘겨버린 억새풀에 잠기게 된다. 여기저기서 부석거리며 가을 소리가 들려온다.

메뚜기와 풀무치 같은 것들의 비상소리도 '빠다다닥!' 마른 소리를 내는 것만 같고, 바람에 부디끼는 억새들의 부석거리는 소리도 잔뜩 말라있다.

가을 억새를 보면 삶의 끝 같은 것을 연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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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눈이 오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 ⓒ 김민수

용눈이 오름은 아직도 푸른빛이다. 이 곳에 삶의 터전을 내린 후 가장 많이 오르내렸던 오름이다. 가을꽃은 드문드문 피어 있을 뿐, 이제 조금 더 추워지면 화들짝 피우려고 한창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한 해가 다르게 개민들레(서양민들레)가 용눈이 오름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으니 한 해가 다르게 용눈이 오름을 화사하게 물들이던 제주의 꽃들이 줄어들고 있다.

오름의 능선들은 부드럽다. 부드러운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오름의 능선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올라가도 늘 같은 대답을 준다. 그 대답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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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눈이 오름에 있는 무덤들 ⓒ 김민수

이생의 삶을 마친 이들에게 주어진 한 평 또는 두어 평의 안식처. 제주의 무덤은 여느 육지의 무덤과는 달리 넉넉하다. 그러나 늘 넉넉하게만 바라볼 수 없는 아픔들도 있다. 흙에서 온 몸이니 그저 다른 자연들처럼 흙으로 돌아가 온전히 왔다가 살았던 흔적들까지도 소유하지 않을 때 온전히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지.

무덤에 서면 우리네 인생이 아무리 많이 가져도 이 정도뿐인 걸 하는 생각에 이기적인 욕심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부질없어 보인다. 더 가지지 못해 힘들다면 어느 망자의 무덤 앞에라도 서서 잠시 삶을 돌아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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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소를 닮은 우도 ⓒ 김민수

가을의 꽃 코스모스. 제주에서는 두 차례 코스모스를 본다. 초여름 산들바람에 피어나는 코스모스와 가을바람에 피어나는 자잘한 코스모스가 그것이다. 제주의 바람에 도통 가만히 서 있는 법 없이 늘 하늘거리며 춤을 추는 코스모스는 신이 처음으로 만든 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단어 자체에 혼돈을 종식하고 질서의 시대를 연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코스모스(cosmos)가 가을 하늘 아래서 하늘거리며 춤을 추는 모습이 행복하게 보인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임과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농부들은 거둔 것들 중에서 가장 실한 것들을 종자로 남겨둔다. 또 다른 시작, 새 봄을 위해서 남겨둔다. 가을 들판에 서서 낡은 것은 모두 가을 바람에 날려버리자.

어릴 적 아버님이 잠자리에서 들려주신 말씀이 문득 생각난다.

"진짜 농부는 말이여, 굶어 죽어도 종자는 먹지 않는 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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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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