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의 아름다움은 교사의 눈속에 있다

담양연수원에서 돌아와 쓰는 가을 편지

등록 2004.10.10 13:21수정 2004.10.15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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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선생님!

가을입니다. 저는 '가을'이라는 우리 모국어를 참 좋아합니다. "가을…" 하고 입 밖으로 작게 소리를 내다 보면 마치 양치질을 하다 말고 말을 한 듯하지요. 둥글고 보드라운 꽈리를 입에 물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고요.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 앞에서 저는 문득 이런 물음을 던져 봅니다.

'가을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

좀 엉뚱한 질문이지요? 이런 난데없는 물음이 제 머리 속에 떠오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한달 동안 끼고 다닌 전남교육연수원에서 제작한 < JLP 중등 영어교사 직무연수 > 교재에는 이런 영어 표현이 있지요.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이의 눈 속에 있다).

a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쑥부쟁이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쑥부쟁이 ⓒ 안준철

만약 저에게도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 아름다움은 필경 누군가 저를 바라보는 이의 눈 속에 존재할 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산이나 들녘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가을 들꽃들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그것을 눈 여겨 바라 보는 사람들이 없다면 들꽃 홀로 아름다운들 별 소용이 없듯이 말입니다.

또한,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영혼이 아무리 맑고 아름다울지라도 성적 만능주의의 편협한 시각에 가리워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면 신이 주신 귀한 재능과 천성의 아름다움은 땅 속 깊이 묻히고 말겠지요.

윤 선생님!


올해 제 나이가 쉰 하나입니다. 이렇게 자기 나이를 발음하고서 그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은 저 혼자만의 경험은 아니겠지요. 사람이 나이를 먹는 대로 살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어쩔 수 없이 쓸쓸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얼마 전에는 좀 충격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여름 방학 때 시립도서관에서 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지낸 것 아시지요? 그 중 저를 보기만 하면 장난을 치지 못해 안달을 하던 한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절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아닙니까.


물론 저를 놀리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참 섭섭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말에 섭섭한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제가 나이를 먹어간다는 반증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a 저 꽃은 홀로 아름다울 수 있을까?

저 꽃은 홀로 아름다울 수 있을까? ⓒ 안준철

작년에도 담임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제 나이였습니다. "아이들이 나이 먹은 선생을 좋아할까?" "좀 더 젊은 담임 선생님을 원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오랫동안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지요. 물론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고 장담하건대, 작년 한해 동안 유통관리과 2학년 4반 교실에서 저보다 젊고 발랄한 아이는 한명도 없었지만 말입니다.

전남 담양연수원 JLP 센터에서의 한달 동안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수료식이 있던 날 저는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저는 제가 교사로서 나이를 먹어 가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곳에 와서 두분 원어민 선생님을 통해 교사의 연륜이 오히려 학생들에게 더 유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두 분이 저에게 일깨워 주신 것은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이의 눈 속에 있다'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저는 아름다운 존재였고, 그것은 제 자신이 아름다워서라기보다는 바로 그 분들 눈 속에 아름다움이 이미 존재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어쩌면 그것은 교사에게 가장 값지고 필요한 재능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a 환한 미소가 일품인 김춘현 영양사님

환한 미소가 일품인 김춘현 영양사님 ⓒ 안준철

제가 이곳에서 만난 사람 중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에 종사하면서도 저에게 크나큰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준 분이 있습니다. 연수원 식당 <만남의 집> 김춘현 영양사이십니다. 그 분에 대해서 연수원과 교육청 홈페이지 '칭찬합시다' 코너에 이렇게 글을 올렸습니다.

'한달 동안 연수를 받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JLP센터 연수원 식당 영양사님의 환한 미소입니다. 한달 내내 변함 없이 보여주신 천사와도 같은 환한 미소는 직업적인 친절을 넘어서는 따뜻한 인간애 바로 그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그분 특유의 환한 미소를 볼 때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묻곤 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런 표정을 짓기가 쉬워 보이지 않아서였지요. 일주일 내내 표정에 변화가 없는 것을 알고서야 본래 그런 분이구나 싶었습니다. 그 분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식당에서 일하시는 모든 분들의 표정이 다 밝고 즐거워 보였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즐거운 마음을 감염시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윤 선생님,

연수원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저는 한달 동안 같은 방을 썼던 룸메이트 송현백 선생님과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 산책을 나갔습니다. 송 선생님 손에는 사진기가 들려 있었고 저는 모처럼 빈손이었습니다. 새벽 어둠이 물러나고 산 너머에서 아침 햇살이 해맑은 이마를 내보이기까지 약 1시간 반 동안 송 선생님은 사진기에, 저는 눈동자에 이른 아침 가을 풍경을 담았습니다.

a 아직 어둑신한 담양 저수지의 이른 아침 풍경

아직 어둑신한 담양 저수지의 이른 아침 풍경 ⓒ 송현백

송 선생님은 고맙게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작업해서 저에게 곧바로 사진을 보내오셨습니다. 디지털 카메라 LCD 창에서 보던 그 아름다운 그림과는 다르게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내용의 편지도 함께 말입니다. 송 선생님이 좀 더 좋은 사진기로 풍경을 담았다면 더 나은 그림을 보내왔을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날 제 눈동자에 담아온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한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아니, 만났다기보다는 먼발치에서 몰래 바라보았다는 말이 더 맞겠지요. 그 아이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 앞 평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지요.

a 차를 기다리는 저 아이의 꿈은 무엇일까?

차를 기다리는 저 아이의 꿈은 무엇일까? ⓒ 안준철

"저 아이의 꿈은 무엇일까? 학교를 향하는 저 아이의 발걸음은 가벼울까? 학교에는 저 아이를 바라보는 어떤 눈들이 존재할까?"

학교에 돌아가면 제 눈에 비친 아이들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곳 담양에서의 저의 소중했던 경험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은 여전할지도 모르지요. 학기 초에 있었던 일인데, 팝송으로 수업을 하면서 "네 안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영웅이 있다"고 가사의 내용을 빌어 말해 주니까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반발하듯 강하게 대꾸를 하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꺼내어 보여 주는 것이 교사의 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이의 눈 속에 있는 법이니까요. 그 몫을 충실히 감당하라고 국가에서 많은 돈을 들여 무려 한달 동안이나 합숙 연수를 받게 한 것이라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윤 선생님!

가을입니다. 제 나이가 계절로 따지면 가을 어느 언저리쯤 되겠지요. 봄이 생명이 예민해지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영혼이 예민해지는 계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아픔과 상처에 예민해지는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의 아픔과 상처도 그들의 아름다움처럼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눈 속에 있기 마련이지요.

어젯밤 한 아이에게서 한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가족들의 몰이해와 냉대 속에서 자신의 꿈을 접어야했던 슬프고 비통한 내용이었지요. 너무나도 건강하고 아름다운 내면을 가진 한 아이가 가족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저는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다'는 말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지요.

a 어둠에 묻힌 너의 아름다움을 비춰 줄께!

어둠에 묻힌 너의 아름다움을 비춰 줄께! ⓒ 송현백

다행히도 그 아이가 보내온 편지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저를 포기하고 싶진 않아요…."

저도 그 아이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도록 옆에서 지켜 주고 싶습니다.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이의 눈 속에 있다'는 말을 끊임없이 제 가슴에 새기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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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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