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거라 삼팔선아, 굳세어라 국군아!

[정치 톺아보기 75] 전방의 '3중 철책선' 절단 미스터리

등록 2004.10.27 18:12수정 2004.10.2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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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책선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남한 군인들. ⓒ 연합뉴스


"아, 산이 막혀 못오시나요/아, 물이 막혀 못오시나요/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련만/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리길…"(대중가요 '가거라 삼팔선'에서)

한반도를 동서로 가른 휴전선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155마일 휴전선'이라는 것은 대개 안다. 그렇지만 155마일의 '마일'(mile)이라는 단위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아 머릿속에서 계산이 잘 안된다.

155마일을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250㎞, 우리 민족의 한(恨)이 녹아 있는 '아리랑식' 거리로는 '발병 나는 10리'가 4㎞이니 약 625리가 된다. 공교롭게도 동족상잔의 6·25와 숫자가 일치한다.

휴전선 155마일은 '발병 나는 10리' '아리랑식 거리'로 625리

'자주국방'의 화신이었던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비명횡사한 지 꼭 25년째 되는 10월 26일 새벽 그 625리에 걸친 철책선(鐵柵線)의 한 귀퉁이가 뚫렸다고 온통 야단법석이다. 그것도 북측의 간첩이 아닌 남측 민간인이 뚫었다고 한다. 발자국으로 보건대, 그 민간인이 최전방의 '3중 철책'과 지뢰밭을 뚫고 유유히 북진했다고 한다. 강원도 철원군 최전방 비무장지대(DMZ)에서 생긴 일이다.

철책이 구멍난 사례는 1978년 무장간첩이 중동부 전선을 넘어온 이후 25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또 이 지역은 과거 70년대에 세 번이나 무장간첩이 침투했으며 70년대 중반 육군 중령이 무전병을 대동하고 월북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 당장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남측 민간인'이 뚫고 올라갔다면 머지 않아 평양의 선전방송을 통해 그 귀순자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거의 전무하지만 지난 80, 90년대만 해도 북한으로의 '귀순자'가 가뭄에 콩 나듯이 어쩌다가 한번씩 가끔은 한 명씩 있었기 때문이다. 대개는 '체제 염증이 나서'라기보다는 노름빚에 쪼들린 경우가 더 많았지만.

국방부의 비공개 통계에 따르면, 53년 휴전 이후 현재까지 월북한 국군은 450여명이나 된다. 그 가운데 10%는 장교이다.

월북 국군 통계를 보면 남북한 양측이 '무장공비'와 '북파공작원'을 활발하게 투입하며 신경전을 벌인 69년까지가 390여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70년대 들어서도 유신헌법 선포 등으로 정치적 억압체제가 가속화되는 72년까지는 해마다 6∼12명에 이르는 국군이 월북했다. 그러다가 80년대 들어 월북 국군의 수는 연평균 1∼2명으로 떨어졌다가, 90년대 들어서는 거의 없어졌다.

월북 주한미군으로는 1965년 부대를 이탈해 월북한 후 현지에서 일본인 납치 피해자인 소가 히토미와 결혼한 것으로 밝혀져 화제가 된 찰스 젠킨슨(64)씨가 있다. 이밖에도 국방부 통계상으로는, 82년에 월북한 주한미군이 한 명 더 있다.

이번에도 군은 26일 새벽에 절단된 철책을 처음 발견하자마자 해당 부대 병력을 확인한 결과 무단 이탈자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 철책을 뚫고 간 '신원 미상자'가 민간인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군은 이날 절단된 철책을 발견한 지 2시간이 지난 새벽 3시쯤에 발령한 대간첩 침투경계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오후 6시30분에 해제하고 작전을 종료했다.

서부전선의 모 군단이 현지에 철책의 전신인 목책(木柵)을 설치한 것이 효시

이처럼 신속하게 상황판단을 해서 작전을 종료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625리에 걸쳐 쳐져 있는 철책선(鐵柵線) 덕분이다. 전방의 군인들이 밤낮으로 철책선을 지키고 있기에 후방의 국민들이 발을 뻗고 자는 것이다.

그러나 철책선을 설치하게 된 내력·과정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어쩌면 지금 전방의 철책선 옆에서 밤낮으로 경계근무하고 있는 장병들 중에서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남북 분단의 경계선은 45년 8월15일에 그어진 북위 38도선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 남북한의 분단경계선은 53년 7월27일 자정을 기해 '전쟁을 잠시 쉬자'며 교전 당사국들이 휴전함으로써 생긴 군사분계선, 즉 155마일 휴전선이다. 그러나 휴전 당시부터 현재와 같은 철책선이 쳐진 것은 아니다.

50년대 전후(戰後) 복구에 주력하던 북한이 이른바 '무장공비'를 본격적으로 침투시키기 시작한 것은 소위 4대 군사노선(전군의 간부화, 전 인민의 무장화, 전 지역의 요새화, 장비의 현대화)을 채택한 후인 60년대 초반부터다.

당시는 경기도 동두천 북방 초성리·강원도 원주 부근에서의 열차 전복 사건, 강원도 양구 인근에서 발생한 21사단 부연대장(홍두표 중령) 살해 사건 등 하룻저녁에만 1개 사단 지역 4개소에서 무장공비가 동시다발적으로 침투하는 등 전선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만큼 침투가 빈번했고 수법 또한 악랄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이를 저지할 수 있을까 하는 궁리 끝에 먼저 서부전선의 모 군단이 현지에 있는 자재를 이용해 철책의 전신인 목책(木柵)을 독자적으로 설치한 것이 그 효시(嚆矢)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름대로 효과는 있었으나 기울인 노력에 비해 성과가 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영구성이 없어 계속 보강해야 했다.

67년 1군 작전참모 시절에 철책선 설치를 건의한 고(故) 이재전 장군(육군 중장·전 전쟁기념사업회장)의 회고에 따르면, 목책선이나마 설치된 곳은 그 군단 지역뿐이고 나머지 지역은 그것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지금은 야전군이 늘어나 3군까지 생겼지만 당시는 1군이 전(全) 전선을 맡는 유일한 전술부대였다. 그런데 전선은 정규전에 대비한 배치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에 책임지역 정면이 넓어 야간에 3~4명씩 쥐새끼처럼 침투해오는 공비를 잡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은 생전에 이 장군의 회고이다.

모 육군 중위 "양심상 여기에 철책을 치는 작업에 종사할 수 없어 북으로 갑니다"

"그러니 공비는 마음대로 아군 지역을 드나들고 우리는 이를 잡기 위해 훈련은 전폐하다시피 하고 연중 수색작전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침투한 소수의 공비 소탕을 위해 경북 영주 지역에 1개 전투사단, 전북 남원 지역에 1개 연대 전투단이 내려가 있을 정도였다.

휴전상태에 있는 군대이기 때문에 유사시에 대비, 교육훈련을 주임무로 해 이에 전념하는 것이 군의 당연한 책무였다. 그런데 모든 부대가 몇 안되는 공비 때문에 항상 불안한 가운데 전전긍긍하며 지내야 했고 전선의 부대 배치는 희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야전군에서는 연구팀을 만들어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대응 방안을 강구하던 중 엄청난 자재와 인력이 소요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비무장지대(DMZ)를 연해 동(東)에서 서(西)까지 현재와 같은 높이·모양의 철책을 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1인당 GNP(국민총생산)는 수백 달러에 불과해 공사에 필요한 쇠고리 철망·철주·철조망 같은 물자는 거의 미군 물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장군은 당시 찰스 H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미8군 사령관과 하프먼(Haffman) 미8군 작전참모를 만나 설득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동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한 것보다 난공사였다. 특히 물자 운반을 위해 헬리콥터까지 지원했지만 험준한 산악지대에서는 더욱 힘들었다. 또 뜻하지 않은 불상사도 있었다.

당시 12사단에 근무하며 철책선 설치작업을 하던 모 육군 중위가 "누가 이러한 계획을 세웠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아도 DMZ로 나라가 분단된 것이 가슴 아픈 데 나는 양심상 여기에 철책을 치는 작업에 종사할 수 없어 떠나갑니다"라는 내용의 편지 1통을 써놓고 월북한 사건이 그것이다.

물론 철책 자체가 적을 막아주는 것은 아니었다. 철책을 설치한 지 몇 달도 안되어 31명이나 되는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철책을 뚫고 청와대 지척까지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김신조 "내래 박정희 멱(목)을 따러 왔수다"

68년 1월21일 김신조(金新朝)를 포함한 북한 124군 부대원 31명은 미 2사단이 관리하는 전방 철책을 뚫고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유유히 서울 시내까지 침투해 나중에 "내래 박정희 멱(목)을 따러 왔수다"라고 말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철책이 뚫리자 1군은 어느 사단이 경계하는 구역의 철책이 뚫렸는지를 점검했으나 한결같이 사단마다 '이상이 없다'는 보고만 올라왔다. 그래서 1군은 침투한 124군부대원 중 유일한 생포자인 김신조를 앞세워 현장검증을 했다. 당시 현장검증을 지휘한 이 장군의 회고다.

"김신조는 거리낌없이 미2사단이 관리하는 구역의 한 철책 앞으로 다가갔다. 외관으로는 전혀 뚫린 흔적이 없었다. 그런데 김신조가 한 군데를 발로 차니 뻥 하고 뚫리는 것이었다. 이들은 'L'자형으로 철조망을 끊고 들어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다시 묶어놓고 갔던 것이다. 그러니 미군도 철책을 점검했지만 몰랐던 것이다. 어쨌든 이로 인해 미군은 할 말이 없게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은 철책선을 더 보강했다. 군은 당초 설치할 때 이 장애물의 수명을 10년 정도로 보았다. 그러나 미군 지원물자가 'A급'이어서 그런지 30년 이상 그 기능을 다했다. 물론 미군 지원물자에 의존했던 철책은 철저한 보수·유지를 거쳐 나중에는 국산 물자를 가지고 복수(複數)로 설치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국산 철조망은 북한의 나진·선봉지역에 사용할 용도로 수출할 만큼 그 '효용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즉, 군은 60년대에 처음 만든 구형 철책 앞에 신형 철책을 치고 그 사이에는 다시 윤형(輪形) 철책을 쳐서 침투를 차단하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너비가 1.2∼1.3㎞에 걸친 지뢰밭을 깔고, 지뢰밭이 끝나는 군사분계선(MDL)의 남방 500m 직전에는 다시 추진 철책을 세워 놓았다. 그런데 3중 철책에 모두 '30(40)×40㎝' 상당의 구멍이 뚫린 것이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이 신원 미상의 민간인은 군부대가 도처에 깔려있는 민간인통제선(민통선)을 넘어 남방한계선 철책까지 접근해 3중 철책선을 절단하고, 다시 1.3㎞에 걸친 비무장지대 지뢰밭을 뚫고 북측 지역으로 넘어간 것이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월북한 당일 철책 경계 근무형태는 부대 경계병력의 3분의 1 가량만 투입하는 'C형'이었다. 1~2시간 동안 1, 2조(1조는 2명)의 병사들이 같은 지역을 순찰하는 방식이다. 초병 외에도 열상적외선 감지기(TOD)가 철책선 부분 부분을 감시한다. 군의 발표대로라면 3중 철책뿐만 아니라 각종 전자장비와 경계병도 따돌린 셈이다.

이 때문에 국방부·국정원·기무사·정보사·경찰청 등으로 구성된 중앙합동신문조가 절단 사실을 인지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서둘러' 이같은 결론을 내린 데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국방부 홈페이지에 쇄도하고 있다.

군이 3중 철책선 절단 사건에 대해 '남쪽 민간인 1명의 월북'으로 결론 내리면서 제시한 근거는 ▲철책선 절단방향이 북쪽이고 ▲전문가와 달리 서툰 'ㅁ'형태로 절단했고 ▲손자국이나 발자국이 북쪽으로 나 있고 ▲북한군 침투흔적이 없다는 점이다.

중앙합동신문조가 강조하는 것은 철책선 절단방식이 'ㅁ'자로, 북한의 침투간첩들이 사용하는 'ㄴ'(L), 혹은 'ㄷ'자 형태와 다르다는 점이다. 철책선 덕분에 두 다리 쭉 뻗고 자는 후방에서는 '가거라 삼팔선아, 굳세어라 국군아!'를 외치면서, '전문가의 함정'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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