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48회

등록 2004.11.04 07:56수정 2004.11.0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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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 완맥을 잡히고 허리를 굽히며 피를 토하던 윤소소는 이미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담천의는 한미령만을 제압한 채 윤소소의 완맥을 놓아 주었다. 그녀는 바닥에 큰대자로 널부러졌다. 워낙 하얀 피부가 피를 쏟음으로서 더욱 창백해 보였다.

“후-----욱----.”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었다. 이미 동공이 풀려 무엇이 보일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경여를 보고 있었다.

“마님... 해치려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이 사람들을 위협해.... 손가장 입구만 갈 수 있다면.......인사를 드리고 떠나고...싶었…….”

죽는 순간에도 경여를 공격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그녀는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숨을 멈췄다. 죽은 그녀의 양손은 죽기 전보다 더 유난히 광택을 띠었다. 익히면 양손이 금속보다 더 강해진다는 백인장을 극성으로 익혔다는 증거였다.

“바보같은 사람.... 왜 백련교에 투신해서...뭐가 부족해서…….”

경여는 자신을 공격했지만 이미 죽은 윤소소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오늘 아침 이 자리에서 식사까지 같이 한 사람이다.

“마님, 손가장에 들어오기 전부터 백련교도가 된 사람이지요.”
담천의에게 완맥이 잡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한미령의 말이었다.


“자네는 왜?”
“소첩도 마찬가지지요. 저희 백련교도들은 한(恨)을 품고 살아가지요. 대명(大明)의 세계, 용화세계(龍華世界)를 꿈꾸며 나라를 세웠건만 오히려 모두들 죽어갔지요.”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엔 회한과 탄식이 흐르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은 하겠다는 의지도 보이고 있었다.


“소첩도 나이가 어려 보지는 못했지만 이 대명을 세운 것은 백련교도들이지요. 저 북방의 오랑캐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 한민족(漢民族)을 구하기 위해 피를 흘린 것은 바로 우리였어요. 백련교를 믿고 양민들을 위한 세계, 언제나 고생하고 신음하는 농민들의 세계를 열고자 피를 흘리면서도 싸우셨지요.”

원을 중원에서 몰아내게 된 계기는 칭기즈칸의 죽음에 따른 사후 후계자 문제로 인한 몽고의 세력 약화와 더불어 중원 각지에서 일어난 백련교도가 주축이 된 농민들의 민란이다. 따라서 사실 대명 건국의 기초는 백련교도가 중심이 된 민란에 있다고 보아야 옳았다.

장내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움직일 생각이나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아다. 오직 한미령과 경여만이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헌데 그 모든 것을 백련교의 이단자(異端者)인 주원장이 가로채 버렸죠. 그가 왜 명(明)이라 나라 이름을 지은 줄 아세요. 명은 이미 우리들의 나라로 이름이 지어져 있었던 거지요.”

주원장 자신도 백련교에 몸담은 적이 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그는 백련교도인 북방 홍건군의 곽자흥(郭子興)의 수하가 되었다가 두각을 나타낸 뒤 고향인 호주(濠州)로 돌아가 자신만의 세력을 키워 나라를 세울 기틀을 만든 정치적으로 뛰어난 인물이다.

“물론 백련교도들이 하나로 뭉쳐 있지도 않았고, 그 중에는 백련교를 사칭해 도적질하는 집단들도 있었지요. 하지만 진정한 백련교도들은 목숨을 걸고 이민족을 이 땅에서 몰아내 오직 한민족의 대명을 세우려 싸웠어요. 주원장은 그렇지 않았죠. 그는 이민족과 싸우지 않고 이민족과 싸우는 백련교도들을 쳐서 군사를 모았어요.”

그녀의 말은 사실 옳았다. 당시 백련교가 중심이 된 농민반란군은 수없이 많았지만 가장 큰 세력은 절강(浙江)의 방국진(方國珍), 안휘성(安徽省) 경주(熲州)의 유복통(劉福通), 호북성(湖北省) 기주(蘄州)의 서수휘(徐壽輝), 안휘성(安徽省) 호주(濠州)의 곽자흥(郭子興), 소주(蘇州) 평강(平江)의 장사성(張士誠) 등이 이끄는 홍건군이었다.

주원장은 이 중 동향인 곽자흥 밑에 있다가 빠져 나와 자신만의 세력을 키울 결심을 했다. 주원장은 고향에서 젊은이 700여명을 모으고 자신의 군대를 조직한 후 이듬해 서달(徐達), 탕화(湯和) 등 24명의 장수들에게 군사를 인솔케 하여 호주(濠州)에서 남하하여 정원(定遠)을 침범하고 여패채(驢牌寨)의 민병 30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또 횡간산(橫澗山)의 의군(義軍) 무대형(繆大亨)의 부대를 기습, 2만여 명의 군사를 획득하여 그 세력을 넓혔다.

이렇게 해서 주원장은 일정규모의 군대다운 군대를 가지게 된 것이다. 결국 원군(元軍)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 지친 홍건군들을 진압하며 세력을 키운 것이다. 이때의 700명을 인솔했던 스물네 명의 장수가 대명의 건국공신 스물네 명의 장수라 일컬어지는 인물들이다.

“그는 농민들의 외침도 외면했지요. 야심에 찬 그는 우리 민초들의 고혈을 빨아 먹으며 부를 늘린 강남의 토호와 지주들과 결탁했어요. 그는 천한 출신 주제에 처음부터 민초들을 위한 나라를 세우겠다는 마음이 없었어요.”

주원장이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기틀이 그것이었다. 그의 홍건군이 다른 홍건군과 달랐던 점은 강남의 호족(豪族)이나 지주(地主)들에 대한 태도로 농민이 주축이 된 다른 홍건군들이 지방토호나 호족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데 반해 주원장은 그들과 결탁하여 지원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결국 다른 홍건군들이 풀뿌리라도 캐어 연명해 나갈 때, 그는 그들의 지원으로 군비를 충당하고 군량을 확보함으로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백련교도의 탈을 쓰고 대송(大宋)의 벼슬도 받으면서 뒤로는 백련교도를 죽이며 현재의 주(朱)씨만을 위한 황제가 된 것이지요. 개, 돼지만도 못한 놈.”

그녀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주원장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는 의미였다. 원말 당시 백련교의 교주(敎主)는 한산동(韓山童)이었다. 그의 신도이면서 세력을 구축한 유복통이 한산동을 송나라 휘종의 8세손이라 하여 민심을 선동하게 되자 원(元)은 천신만고 끝에 한산동을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그러자 유복통은 한산동의 아들인 한림아(韓林兒)를 황제로 옹립하여 원에 멸망한 송(宋)의 뿌리를 잇는다하여 국호를 대송(大宋)이라 하였고, 그 진위여부와는 상관없이 원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중원에 각기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홍건군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주원장도 곽자흥이 죽은 후 처음으로 대송(大宋)의 황실로부터 좌부원수(左副元帥)라는 직책을 임명받았으며 그 뒤에도 더 높은 직책 임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결국 주원장도 백련교주가 중심이 되어 세운 대송의 신하임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의 탈을 쓴 짐승 같은 그놈이 소명왕(小明王)을 죽이고 명을 세운 뒤에도 자신의 죄가 밝혀질 까봐 백련교도들의 씨를 말리려 했던 간악한 놈이지요.”

말을 하는 중간에 그녀의 입에서 한줄기 선혈이 흘렀다. 그것을 본 전연부가 급히 외쳤다.

“담소협, 그녀의 아혈을 짚으시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담천의는 그녀의 움직임을 완전히 제압했고, 그녀가 경여에게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두고 있었다. 그리고 전연부의 말을 듣고 아혈을 제압하려하자 그녀는 이미 독단을 깨물어 삼킨 뒤였다.

“마님, 죄송해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미워도 마님에게만은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경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 그러한 이상향이 목숨보다 귀중했나?”
“그럼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꿈꾸죠. 이곳에서는 음식이 남아 버려지지만 민초들 집에는 쌀 한 톨이 없어 겨우 죽 한 끼로 하루를 때는 집도 많아요.”

한미령는 웃고 있었다. 그녀의 눈엔 미륵불이 설법을 한다는 도솔천(兜率天)이 보일런지도 몰랐다. 담천의는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이미 죽어가는 사람이다.

“한마님, 잠깐만, 백련교에서 왜 두 소저를 노렸던 거요?”

전연부는 정말 알고 싶었다. 아니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알고 싶었다.

“내가 말 안 해도 어차피 당신들은 곧 알게 될 텐데, 욱!”

독약의 약효가 본격적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대개 독단은 내부로 들어가면 일단 내장부터 녹이고, 그 뒤에 혈맥을 따라 흐르다 심장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미륵하생(彌勒下生) 명왕출세(明王出世)----!”

그녀는 하늘을 대고 주문(呪文)을 외었다. 그녀의 얼굴에 지어진 미소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전륜성왕이 이 땅을 지배하는 날 미륵….”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꺾었다. 전연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가 어제 표물을 뒤지고, 외부와 연락한 다음에 두 소저를 죽이려 했던 장본인이오. 또한 간마님 방에 자신의 미륵불을 넣어둔 사람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녀는 간효용과 장을 보러 나갔던 것이다. 전연부는 내동댕이처진 아취를 향해 가보았으나 그녀 역시 독단을 깨물고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이제 다 끝난 것인가?”
손불이의 힘없는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보아야겠지요.”

전연부의 피곤에 절은 목소리였다. 손불이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도 피곤함과 애석함이 묻어 나왔다.

“수고하셨네.”
“손대인과 일행 분들 덕분이지요.”

그는 정말 피곤한 것 같았다. 일을 마치자 긴장이 풀어져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죽은 사람들은 후히 장례를 치루어 주도록. 그리고 이 일은 외부에 발설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그가 경여에게 말하자 경여 역시 눈물이 비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관가에는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고.”
그는 또 한 번 전연부를 이용할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는 상인이기 때문이다.
(12장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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