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에 하늘이 깃들어 있네!

어린 시절 장독대를 추억하며...

등록 2004.11.15 19:13수정 2004.11.15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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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에 빠진 하늘
장독에 빠진 하늘김규환
며칠 전 한의사의 초대로 댁에 놀러 갔다. 조촐한 막걸리 파티를 열었다. 새로 지은 건물 집들이를 겸한 자리였다. 발코니가 꽤 넓다. 대나무에 몇 가지 식물이 새 둥지에 안겨있다. 밖으로 나가봤더니 크고 작은 항아리 열댓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원장님 어디서 구하셨어요?"
"예, 집을 짓고 보니 아파트에만 살아서 그런지 처음엔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업고 왔습니다."
"정말 좋은 것만 고르셨는데요."
"좋아 보여요?"
"이것 하나 들여오니까 집이 온화합니다. 잘 하셨어요. 새 집은 이렇게라도 정을 붙이셔야죠."
"그 뒤론 잠도 잘 온다니까요."

어느 대가일까. 순창에서.
어느 대가일까. 순창에서.김규환
항아리를 보니 시골 생각이 절로 났다. 나도 내 집을 가지면 장독은 필수 항목이다. 어린 시절 우리가 먹는 대부분을 보관했던 장독을 다시 보는 기분이었다. 작은 독에서 막걸리를 따라 먹으니 새록새록 향수가 묻어나왔다.

장독은 어머니 품이다. 물동이 두어 개에 배나무, 감나무 잎이 떨어져 살포시 덮어준다. 적당한 그늘에서 장이 잘 익는가 보다. 짭조름한 묵은 장에 콩 알맹이가 살아 있는 된장독, 하얀 곰팡이도 함께 살자며 자리 잡은 고추장 도가지, 굵은 소금 넣었던 소금 독, 멸치젓갈 곰삭도록 담긴 젓갈 독에 장아찌 종류마다 박아두고 무 배추 겉잎도 절여 놓았다.

친구네 장독대가 외롭다.
친구네 장독대가 외롭다.김규환
봄날엔 벌 떼가 암모니아 흡수하려 몰려들었다. 한여름엔 파리가 떼거지로 몰려들어 잠시 틈을 보아 파리가 똥을 찍찍 갈겨대면 된장에서 구더기 우글우글 하니 속을 뒤집어 놓았다. 모기장을 씌워도 그러매 “된장에 든 구데기는 먹어도 상관없어, 고깃국 언제 먹어보냐”며 토장국 진하게 끓여 밥상을 채웠다.

늦가을엔 김장을 했다. 배추김치, 무김치도 각각 2가지로 나눴다. 고춧가루와 양념을 듬뿍 넣어 발갛고 먹기 좋도록 간을 한 일반 김치 한 가지와 소금과 고춧가루만 넣고 둘둘 비벼서 춘삼월에 설컹설컹한 맛으로 먹게 절여놓은 짠지가 그것이다. 소태맛에 가깝던 그 김치엔 굵은 소금이 쏟아지기도 했다.


눈 쌓인 장독대에 참새 한마리 퍼드득 날던 그날
눈 쌓인 장독대에 참새 한마리 퍼드득 날던 그날김규환
겨울엔 싱건지, 동치미를 꺼내 먹는 재미가 있다. 어찌나 눈이 많이 내렸던지 간신히 눈을 쓸고 칼 꽁뎅이로 얼음을 푹푹 깨서 한 그릇 떠와서 맹물로 간을 맞추면 동동 뜬 얼음과 무 뿌리 그리고 물고구마 몇 개로 배를 채웠다.

산 너머 외갓집 장독엔 실고추, 배, 밤, 대추, 생강, 청각, 쪽파 소를 넣은 배추동치미가 맛있었다. 달달했다. 정성이 있었다. 집안 분위기가 거기에서 나왔다. 인심도 장독에서 나온다. 손맛도 다르다. 집집마다 항아리 크기도 달랐고 분위기도 다르다. 그렇게 작은 차이가 대대로 이어지며 사람들 얼굴을 달리 만들었다. 구인사(救人寺) 마당 500개 항아리도 같은 건 없었다.


눈에 파묻힌 항아리. 김장을 서두르고 김치독을 묻을 때다.
눈에 파묻힌 항아리. 김장을 서두르고 김치독을 묻을 때다.김규환
세월은 흘러도 아름다운 것은 여전하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배부르던 장독대. 장독엔 하늘이 깃들어 있다. 장독에는 장만 들어있지 않다. 장독에는 추억이 있다. 늘 어머니가 있었고 맛이 있었다. 건강이 있다. 장독에는 생선도 있었다. 질박한 항아리를 받치고 있는 돌 위엔 봉숭아가 피었고 나팔꽃이 아침에 환하게 웃었다. 내가 손수 만든 아이스크림도 있었다.

장독, 장독대, 오가리, 항아리, 장 단지, 도가지에 시루가 엎어져 있던 풍경. 싱건지, 나박김치, 배추지, 고등어, 갈치, 배추 실가리, 무장아찌, 오이장아찌와 된장엔 고추와 들깻잎을 박아두었다. 그게 다였다. 광에는 마른 나물이 살고 있더라.

숨바꼭질 하다가 덮개를 깨트렸던 동무들은 어디 간 걸까? 독장수 지게지고 지나가면 물어봐야지. 차라리 냉장고 장수에게 물어볼까보다. 항아리는 다 어디 갔느냐고…. 장독 옷 입힐 사람은 다 어디 갔느냐고….

콩나물 시루와 물동이. 그냥 저것만 이고 가라해도 목이 빠진다고 할텐데...
콩나물 시루와 물동이. 그냥 저것만 이고 가라해도 목이 빠진다고 할텐데...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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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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