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67회

등록 2004.12.01 09:21수정 2004.12.0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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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만화는 갑작스런 곡소리와 비명, 그리고 목탁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고 그들이 온 것을 알았다.

그들은 열흘이라는 행사 기한은 지켰으되 새벽에 들이 닥친 것이다. 새벽은 언제나 경계가 가장 허술해지는 시기다. 어둠이 짙어지며 긴장했던 사람들은 새벽이 되면서 피곤과 졸음이 쏟아지며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구파일방에서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들이 도착했다면 장관사가 자신을 깨웠을 것이다. 하지만 기이하다. 비명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조용해진다. 경문을 외는 소리와 목탁소리도 금세 사라졌다.

양만화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사영천의 살수들은 소리가 없다. 그들이 은밀하게 초혼사자들을 베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침상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다.
와--장---창----!
방문이 산산조각 나며 피투성이가 된 장준이 그의 앞으로 굴러 떨어졌다.

“대....대인.”

이미 동공이 풀려있다. 그의 앞가슴에서 아랫배까지 예리한 칼로 난도질한 듯 너덜거리고 있었다.


“허--억....종...종리....추....그....컥!”

양만화가 부축하며 일으키던 장준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 발작과 함께 두 눈을 까뒤집으며 숨을 멈췄다. 그의 목에 꽂혀있는 문살조각 하나. 그리고 방안으로는 삼십대 초반의 사내가 들어서고 있었다.


유생 차림의 사내는 가늘게 떠진 눈과 유독 얇은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얼굴을 가진 사람은 대개 침착하고, 냉정하며, 냉혹하다 할 만큼 결단력이 좋은 사람이다.

“양만화, 이제 죽을 준비가 되었나?”
“웬 놈이냐?”

양만화는 장준의 시신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키며 방안으로 들어 온 사내를 바라보았다.
뒷짐을 지고 유람 나온 것처럼 옅은 청의에 유생건(儒生巾)까지 쓴 사내.

(고수다!)

양만화가 그에게 받은 느낌은 그것이었다. 양만화도 무공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무림에서도 통용될 정도의 고강한 무공을 익혔다. 하지만 저 사내와는 차원이 다르다. 사영천의 천주인 종리추도 저 정도는 아니다.

(종리추도 당했단 말인가?)

초혼령은 예상과 다르다. 아니 추측불가다. 사영천의 힘은 한 문파의 힘을 능가한다. 더구나 이러한 야밤에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들의 소리를 들은 지 채 일각이 지나지 않아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 사내는 뒷짐 진 오른손을 불쑥 양만화에게 내밀었다.

“내놔.”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양만화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는 귀계(鬼計)와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난무한다는 상계에서 커 온 사람이다. 그는 냉정을 찾기 시작했다.

“자네가 초혼령주(招魂令主)인가?”

사내의 얇은 입술에서 미소가 떠오른다 싶다. 섬뜩한 미소다.

“네 목숨과 초혼령!”

무형의 기운이 양만화의 전신을 덮는 듯 했다. 기습을 한다 해도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서도 양만화는 자신이 살 수 있는 한 가닥 끈을 잡았다.

(초혼령.....!)

그는 품속에서 초혼령패를 꺼내들었다.

“이것 말인가? 하지만 이걸 주기 전에 거래하고 싶은데….”

양만화는 죽어도 상인이다. 그는 거래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고 믿어왔다.

“네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가?”

상대는 양만화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대가만 적당하다면.”

양만화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가를 치를만한 것이 있나?”

양만화의 재산은 자신도 모를 정도로 많다. 그 사실은 중원 누구라도 알고 있다. 양만화는 그의 대답에 거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충분하고도 남지. 물론 거래 후 당신의 태도에 따라 본 장주는 죽을 때까지 당신을 후원해 줄 수 있어.”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아무리 청렴결백한 관리도 명분만 있으면 주는 돈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가 살아 온 철학이었고, 생활신조였다.

“양만화! 너는 잘못 생각하고 있군. 네 놈이 가진 재산은 본래 우리 것이야. 남의 돈을 가지고 거래하자고 하면 사기꾼이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양만화의 재산이 왜 저들의 것일까?

“도대체 알 수 없는 말이군.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이 초혼령주의 것이라는 말인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네 애비인 양귀(揚貴)에게서 듣지 못했나? 육시(戮屍)를 하고도 남을 양귀 놈은 마지막 군자금(軍資金)을 가지고 도망을 했지.”

그 말에 양만화는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상대가 누군지 알았다. 그들이다. 지금까지 알려졌던 초혼령주가 아니다. 자신의 부친인 양귀가 유언까지 하면서 대비하라던 그들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 올 것이라고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라던 그들이다.

사실 양만화가 사영천을 조직한 이유도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있으면 안 될 일이었지만 만약을 위해 거금을 써 가면서 조직한 것이 사영천이다. 상대가 그들이라면 이미 타협의 여지는 없다. 더구나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그는 거래를 포기했다.

“네놈의 목숨 값은 개만도 못해. 어차피 네가 있으나 없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어. 혹시 모르지. 금릉에 가 있는 네 아들 목숨 값이라면 몇 푼 쳐줄 수 있지만 네 아들놈은 이미 내 손에 있으니까.”

“그 아이까지 네놈들이?”

지금까지 안심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금릉으로 떠나보낸 지 벌써 칠년이 지났다.

“그 놈은 꼭 있어야 하지. 왜냐하면 네 재산 모두를 우리에게 돌려주어야 할 놈이니까.”

이들은 자신을 죽인 후에 자신이 이루어 놓은 재산까지 차지하려 한다. 양만화는 반드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그렇다고 너무 억울해 하지 마. 어차피 자식 놈은 벌써부터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있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지. 우리에게 진 빚도 꽤 많고 말이야. 평생 주지육림에 빠져 살게 해 줄 거야.”

결국 폐인을 만들겠단 말이다.

“나쁜 놈들.”
“나쁜 짓으로 치자면 네놈의 애비가 훨씬 많지. 네 애비의 도둑질로 인하여 수 만 명이 먹지도 입지도 못한 채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도 못하고 죽어갔어. 한결같이 양귀 그 놈의 살과 뼈를 씹어 먹겠다는 한을 품고 말이야.”

“…”
“네놈 역시 다를 바 없어. 네놈은 네놈이 알았던, 알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놈이야. 헌데?”

말을 하던 그 사내가 싱긋 웃었다.

“아,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보겠다는 생각인가? 화산이나 종남파에서 도와준다고 했으니 오기만 기다리는 모양이지?”

그런 사실까지 알고 있다. 저 사내는 독안에 든 쥐를 희롱하고 있다.

“기다리지 마. 그들은 오지 않아. 아니 네놈이 죽고 시체가 썩을 즈음이면 모르지.”

언제 양만화가 이런 모욕을 받아 보았는가? 하지만 그는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마지막 한 순간까지 그는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를 택하려 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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