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덕에 대접 잘 받는다"

[정치 톺아보기 77] 노 대통령의 영국 국빈방문

등록 2004.12.02 18:09수정 2004.12.0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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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대통령 내외가 1일 저녁(한국시간 2일 오전) 버킹검궁에서 열린 국빈만찬에 앞서 엘리자베스 여왕과 에딘버러공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 연합뉴스 도광환

흔히 영국(United Kingdom)이라고 줄여서 표현하는 영국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과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은 '여왕의 나라'이다. 국가(國歌)도 'God Save The Queen'(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이다.

영국과의 수교 122년만에 한국의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여왕의 초청으로 영국을 국빈방문(state visit)한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1일 오후 여왕 관저인 버킹엄궁의 앞마당인 호스 가즈(Horse Guards) 광장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장에 도착하는 순간에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입장과 함께 'God Save The Queen'이 연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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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막바지 치닫던 52년 2월6일 26살에 즉위해 52년 동안 군림

엘리자베스 공주는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52년 2월 당시 부친이자 국왕인 조지 6세가 와병으로 호주·뉴질랜드 방문을 포기했을 때 아버지를 대신해 필립공과 함께 두 국가를 방문했다. 그리고 2월6일 이 순방 여정의 첫 기착지였던 케냐에서 공주는 부친의 사망과 동시에 이뤄진 자신의 즉위 소식을 들었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나이 26살 때였다.

여왕의 대관식은 한국전쟁 휴전 직전인 53년 6월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영국의 귀족과 하원, 그리고 영연방 국가들의 총리들과 외국 정부의 대표들이 이 대관식에 참석했다. 대관식은 라디오로 전 세계에 방송되었으며 여왕의 요청에 따라 텔레비전으로도 방영되었다. 당시 막 개발된 텔레비전이라는 매스미디어는 이 대관식의 볼거리와 의미를 전 세계의 수 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사상 유례 없는 방식'으로 확실하게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52년에 영국의 40번째 군주로 즉위한 엘리자베스 2세는 오늘도 '군주는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전통에 따라 52년 동안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녀는 영국의 국가원수이자 영연방 국가의 수반이다.

대외적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은 모든 영연방 54개 회원국의 수장으로 인정되며, 캐나다 등 다수의 영연방 회원국들의 여왕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캐나다로 이민 가는 외국인이 맨 처음 서약하는 것은 '국기에 대한 맹세'가 아니라 '여왕에 대한 충성의무'이다.

여왕은 정치에도 일정 부분 관여하고 있다. 주한 영국대사관에서 운영하는 여왕 관련 공식 사이트(http://queen.britain.or.kr)에 따르면, 국가 원수로서 여왕은 총리와 밀접한 연락을 취하고 있으며 여왕이 런던에 있을 때에는 총리와 내각의 다른 각료들을 매주 접견한다.

또 여왕은 내각의 회의와 내각 위원회들의 회의에 대한 모든 기록을 검토하고 중요한 외무부 전신을 받아보고 의회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간략한 보고도 받는다. 지금까지 여왕은 토니 블레어 총리를 포함한 열 명의 총리와 함께 일해왔다.

그러나 여왕의 정치적 중요성은 '실무적' 기능보다 '의례적' 기능에 있다. 여왕은 영연방 국가들과 다른 국가들의 원수가 영국을 방문할 때 그들을 영접하고 외국에서 온 다른 명사들도 영접한다. 그리고 이런 의례적 역할은 여왕의 온화한 미소와 함께 영국 및 영연방 국가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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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국빈방문중인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 환영행사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함께 황금장식으로 된 마차를 타고 버킹엄궁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AP

영국 국빈방문은 세계 속에서의 국가의 위신과 위치를 확인하는 의미 있는 기회

노 대통령의 영국 국빈방문이 화제다. 노 대통령의 영국 방문은 우리나라 국가원수로는 여섯 번째이다. 그러나 공식 방문(official visit)이나 실무 방문(working visit)이 아닌 영국 여왕이 외국 국가원수들 가운데 연간 두 명만 자신의 관저인 버킹엄궁에 초청해 맞이하는 국빈 방문(state visit)으로서는 처음이다.

이에 따라 노 대통령 내외는 3박4일의 방문기간 동안 버킹엄궁에 체류하면서 영국왕실과 정부로부터 화려함과 품격을 갖춘 최상의 의전과 예우를 받는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공식 환영식에 앞서 세인트 제임스궁에서 가진 동포 간담회에서 국빈방문 추진 '뒷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아 주목을 끌었다. 가끔은 너무 솔직해서 탈이 날 때도 있지만, 의례적인 것보다 실용적인 것을 더 좋아하는 노 대통령 다운 단도직입적 어법이다.

"영국에 국빈방문하러 한 번 오는 것이 여러 나라 국가원수들에게 꿈이라고 한다. 저는 격식을 잘 모르고 이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줄 잘 몰랐다. 그래서 국빈방문 하자길래 '격식과 절차 까다롭고 골치 아픈 걸 왜 하자냐'고 했더니 외교장관이 눈이 동그래가지고 보더라.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냐는 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리 애를 써서 맞춰놓은 건데 (김 전 대통령) 임기 중에는 기회 못 얻고 우리가 이번에 기회 만들었는데, 대통령 개인뿐 아니고 영국 국빈방문은 세계 속에서의 국가의 위신과 위치를 확인하는 의미 있는 기회인데 그걸 안 간다니 말이 되냐'고 해서 암말도 못하고 갑시다 해서 왔다."

실제로 영국 국빈방문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영국 여왕이 국빈으로 맞은 국가원수들을 보면 지난해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부시 미국 대통령이 다녀갔고, 올해에는 지난 5월에 크바스니예프스키 폴란드 대통령이 다녀갔을 뿐이다.

역시 한해에 두 차례씩 이뤄지는 영국 여왕의 해외 공식순방은 더 까다롭다. 두 차례 공식순방 중 한 번은 영연방 국가에 할애하고, 나머지 한 번을 비영연방 국가에 할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98년 취임 직후에 김대중 대통령이 ASEM(아시아-유럽 정상회의) 참석차 영국을 방문해 99년 4월 영국 여왕의 한국 공식방문을 이끌어낸 것은 대표적인 정상외교의 성과로 꼽힌다.

입헌군주제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실감나지 않는 일이지만, 영국 여왕이 움직이면 왕실 출입기자 50여명과 세계 각국 기자 100여명이 동행하며 여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전세계에 전파하게 된다. 그러니 여왕의 한국 방문은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전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노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덕분에 다니며 대접 잘 받는다"

노 대통령의 이번 국빈방문은 그 성과를 이어받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통령의 영국 국빈방문은 여왕의 한국 방문에 못지 않게 '세계 속에서의 국가의 위신과 위치를 확인하는 의미 있는 기회'이다. 노 대통령은 평소에도 간헐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을 피력해왔지만, 이번 영국 국빈방문에서 그 점을 확실히 인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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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9년 4월 한국을 공식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맞이하는 김대중 대통령. ⓒ 김녕만

"전임 대통령들이 좋은 것도 남기고 나쁜 것도 남겨준다. 다 말할 수는 없고, 제 전임(김대중 전 대통령)만 말씀드리면 한국의 행정이나 정치가 가져야 할 기본 틀, 인권이나 사회복지, 역사 문제, 적어도 기본적인 틀은 마련해서 자리를 잡아줬다고 생각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을) 그대로 두면 흐지부지되겠지만 제가 착실히 내용을 채워나가면 국가의 틀이 반듯하게 세워지겠다는 믿음 갖고 있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복지 이런 틀을 잡아줬다. 외교하러 나가면 내가 주목, 대접받는다. 그럴 이유가 없지 않냐. 정치와 경제가 그만한 수준이고 국민들이 세계 도처에서 역량 발휘해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 위에 김대중 전대통령에 대해 갖고 있었던 존경이 있다. 인권 지도자, 민주주의 정치 지도자로서, 일관성 갖고 왔던 지도자로서의 명성이 있고, 남북관계 북핵 푸는데 있어서도 큰 방향을 잡은 게 세계 지도자들 공감을 얻고있기 때문에 명망 있다. 전 덕분에 다니며 대접 잘 받는다."


노 대통령은 공식환영식에 이어 1일 저녁(한국시간 2일 오전) 버킹엄궁 2층 연회장에서 여왕이 마련한 국빈만찬에서도 다시 한번 최고의 영접을 받았다. 무려 3시간여 동안 진행된 만찬에서는 여왕이 53년 대관식 때 사용한 고풍스런 유리잔과 함께 1985년산 적포도주인 '샤또 그뤼오 라로스 상 줄리앙'이 나왔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만찬사에서 "본인이 즉위했을 당시 한국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고 말하고 "불행하게도 50년이 지났음에도 한반도는 아직 분단된 채로 남아 있다"고 아쉬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여왕은 또 "필립공(에딘버러공)과 내가 5년 전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기쁨이었고 우리는 방문했던 곳마다 한국민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던 것을 매우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국 방문을 회고했다.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우리 국민은 5년 전, 한국에서 보여주신 폐하의 따뜻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고 화답했다. 노 대통령은 또 "한국전쟁에 모두 5만7천명의 영국 젊은이들이 참전했고 사상자만 4300명에 이르는데 이분들의 고귀한 희생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고 양국간 우의를 강조했다.

노 대통령 "나도 결심했다"

노 대통령은 또한 "나도 결심했다"면서 김 전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계승 의지'뿐만 아니라 '극복 의지'도 분명히 밝혔다.

노 대통령은 "국내소비 어렵다"고 전제하고 "소비가 늘지 않아 어려운데, 무리하게 소비를 진작시키려고 했던 것이 현재 우리 경제에 큰 부담 주는 큰 원인이다"면서 "지금부터 소비를 회복시키는 과정에서도 무리수를 쓰지 않겠다는 게 제 결심이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어 "제 임기동안에도 내 욕심으론 분명한 회복 기조를 바로잡아서 국민들이 자신감과 희망 갖고 힘차게 자기 일들 해나갈 수 있도록 하려 하지만 아울러 제 임기 동안에 발생한 원인이 그 다음에 또 새로운 경제 부담되는 일은 절대 없게 하겠다고 결심하고 있다"면서 "인기가 좀 떨어지더라도, 경제 어려워서 원성이 빗발치더라도, 원칙은 흐트리지 않으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경제뿐만 아니라 북핵문제에 대해서도 노 대통령은 "반드시 풀어낼 거고 그게 단지 핵문제 푸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풀기 위해 회담 테이블 앉았던 6개 국가가 앞으로 동북아가 상호간에 협력하고 서로 공동의 번영을 꾀하고, 공동체의 평화를 확실히 다지고 번영 추진하는 논의의 틀이 되도록 만들도록 준비하고 있다"면서 "전화위복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다"고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한반도의 긴장문제가 해결되고 평화 번영 시대 들어서면 동북아가 가진 자원의 크기를 생각해 보라"고 반문하고 "엄청나다"면서 "그게 우리에게 위협이 아니라 기회라고 확신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장애가 없는 거 아니겠지만 한국 국민들의 뜻을 벗어나는 걸 누구든 강행할 수 없다"면서 "어느 나라라도 그렇게 할 수 없고 국민역량이 그만한 걸 담보한다"고 주체적인 국민역량을 역설했다.

마치 입을 맞춘 듯 손발이 척척 맞는 전·현직 대통령

한편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 대통령의 영국 국빈방문 하루 전날인 11월30일 '21세기와 한민족'을 주제로 열린 건국대 특강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문제에 대해 열성적으로 잘 하고 있다"고 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적극 두둔해 눈길을 끌었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후 처음으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날 강연에서 한 청중의 질문을 받고서 "내가 볼 때 노 대통령이 남북문제 대단히 열성적으로 잘하고 있다"면서 "남북문제만큼은 여야 모두가 당 입장을 떠나 협력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남북문제에 대한 초당적인 협력을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최근 정부 여당의 정책을 둘러싼 '좌파' 논란에 대해서도 "우리나라에서 좌파나 이런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이고 시장경제이고 복지사회"라며 "한 두 사람이 특별한 얘기를 한다고 몰아세울 필요는 없고 국민여론을 통합시켜 나가면 큰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1월9일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 참석차 유럽을 방문해서도 "그동안 미국의 부시 정권은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거부하고 확실한 보상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면서 미국이 전향적으로 나설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북핵문제 및 6자회담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한 노 대통령의 'LA 선언' 직전의 일이다.

"북한 핵문제의 해결은 충분히 가능합니다…그동안 미국의 부시 정권은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거부하고 확실한 보상 의사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제 부시 행정부 2기에 들어서면서 북한 핵문제 해결에 대한 유연한 대책이 발표되기를 한국민은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전쟁을 반대합니다. 북한 핵도 반대합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평화적으로 대화를 통해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지난 2년을 되짚어보면, 대북송금 특검 수용으로 서먹서먹해진 전·현직 대통령의 관계는 대북송금 관련자에 대한 사법처리와 분당(分黨)으로 김 전 대통령의 대북 '햇볕정책'을 지지한 평화세력과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의 이탈로 이어졌다.

사실 하늘 아래 '최초'인 것이 어디 있으랴만, 처음부터 두 사람은 2인3각 관계였고, 노 대통령의 성공은 곧 김 전 대통령의 성공이었다. 그런 점에서 뒤늦게나마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두 전·현직 대통령의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지는 언행을 보이는 것은 두 사람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도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다.

국운이 상승할 길조다. God Save The President R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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