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이나 밭을 갈 때나 멀리 이동을 할 때 농작물을 뜯어 먹지 못하게 주둥망을 씌운 소. 재갈을 물리기도 했다.김규환
마을을 빠져나가 논둑길로 뛰었다. 학교 모퉁이를 지나 도둑거리 앞을 지나도 보이지 않는다.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래도 세 윗마을로는 가지 않았겠지.' '내 요놈들 잽히기만 해봐라. 혼쭐을 내고 말텨.'
온갖 상상을 했단다. 가봐야 산뿐이니 무조건 큰 걸 훔친 사람들은 아랫마을 송단-원리에서 선세재를 넘어 오산을 거쳐 호남고속도로 사거리를 통과하여 옥과읍내로 갈 것이다.
끝자리 3일과 8일에 장이 서는데 마침 가던 날이 장날이라 팔고서 손을 털기도 쉽지만 필시 그리 올 것이라는 확신에 서두르기만 하면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무작정 달렸다.
당시 소를 팔려면 누구든 주둥망을 입에 씌우고 코뚜레를 한 손으로 잡고 소꼬뺑이(코뚜레에 연결하여 나대지 못하도록 연결한 단단한 나일론 줄)를 짧게 매서 직접 끌고 가야 했다. 소도둑들이 조직적일 수 없었던 건, 순발력의 기본인 차량이 없을 때라는 점과 도로 사정이 차가 다닐 만큼 원활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
여전히 응달엔 소 발자국이 있었다. 쇠똥도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오산면사무소 근처에 다다르니 날이 환히 샜다. 물 한 모금 얻어먹고 죽기 살기로 마저 뛰었다. 그나마 큰 길이라 광주로 향하는 광신여객 버스가 지나더란다. 앞을 막아 차를 세워서 타고 십여 리를 더 가니 옥과, 쇠전이 있던 옥과장이다.
면소재지지만 광주와 순천 중간 길목에 있던 옥과장은 대목장이 멀지 않은 시기라 차츰 열리는 시간도 빨라지고 장이 커지니 사람들 발길도 잦아 훨씬 붐볐다.
한눈팔지 않고 형제는 곧바로 시장 맨 뒤에 자리잡은 우시장으로 향했다. 버스 덕분에 시간을 1시간 가량 절약한 두 분이 도착해보니 쇠양치(송아지)가 털레털레 모이고 있고 큰 소 성우(成牛)는 따로 말목에 묶여 팔려나갈 운명이었다.
조금씩 훑어나가는데 조금 이른 시간이라 살 임자가 나타나지 않고 다들 국밥집 주변으로 몰려 있었다.
"어이 용십(용섭)이 쩌거 아닌가?"
"예, 찾으셨수?"
"저거 말이시 저것이 맞아."
"맞구만이라우. 가만히 지켜보다가 매가지(모가지)를 따버립시다."
"별일 없게 처리하소."
"알았어라우. 염려 말고 지켜만 보싯쇼."
소피를 누고 다시 나타난 묶인 소를 마치 제 것인 양 찾으러 온 사람은 옆 동네 강례 사람 둘이었다.
"네 이노옴~"
"아니 그게 아니고라우~"
"이 호랭이 물어갈 놈들이 소도둑이 아니고 뭐여? 이것이 니기들 소 맞어?"
"아따 놓고 말허싯쇼."
"그려 이놈들아 우리 성님 소다. 니기들 지서로 갈텨 순순히 내놓을 거여?"
사람들이 죄다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잡아버린 쾌거였다. 두 사람 이름과 얼굴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기에 그 자리에서 소 꼬뺑이를 건네받은 조건으로 아무 일 없던 것으로 하기로 했다. 아직 내다 팔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우리의 용감한 두 형제들은 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주전자를 비우고 30리 길을 다시 돌아왔다.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까 무슨 소식이 올까 손꼽아 기다렸지만 전화가 없던 시골마을이요, 십리를 걸어 첫차에 몸을 실어 장에 간 사람들은 아무 영문도 몰랐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두 분이 돌아오시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금껏 두 분은 이 일을 불문에 붙였다. 두 분 중 동생인 아버지는 몇 해 전 돌아가시고 큰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사촌형 집에서 건강하게 살고 계신다. 마침 그 시절 소도둑이 극성이었던 건 다들 서울로 광주로 농토를 버리고 떠나던 때와 무관하지 않다. 돈 벌러 간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거니와 한몫 잡아보겠다는 욕심이 생길 때였다.
그 뒤론 빗장에 꺽쇠가 채워졌고 아무나 마을을 얼씬거리면 의심받기 일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