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판수는 그 말에 어이가 없었다.
'겨우 종이 한 장을 믿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평양으로 가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라니! 아버지의 묘도 이장해야 하고 어머니와 동생도 찾아야 하는데!'
장판수의 어쩔 줄 모르는 듯 하는 표정을 본 정혼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천천히 말했다.
"이진걸은 무예가 뛰어난 자이고 사람들에게 이를 가르치는 것을 즐기는 자다. 게다가 평소 여러 사람들과 알고 지내니 내게 길을 열어줄 것이 틀림없다. 갑사가 되기 위해서는 힘들더라도 나로서는 이 방법밖에 가르쳐 줄 수 없구나."
정혼은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는 투로 도포자락을 경망스레 휘날리며 장판수에게서 떠나 버렸다. 장판수는 일단 정혼이 준 종이를 품 속에 넣은 뒤 용천산성으로 가리라 마음먹었다.
강화도로 내려올 때와는 달리 용천산성으로 가는 길은 고되기 짝이 없었다. 정혼과 올 때는 장계를 지니고 가는 길이라 드문드문 관청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으나 전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곳에서 장판수 혼자 길을 가며 숙식을 해결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장판수가 아버지 장한본을 묻은 곽산까지 갔을 때는 상으로 받은 베조차 숙식비조로 다 써버린 상태였다. 장판수는 기억을 더듬으며 아버지를 묻은 곳을 가까스로 찾아낸 후 양지바른 곳을 찾아 미리 준비했던 삽으로 깊이 땅을 파서 시체를 안치한 후 봉분을 만들었다.
"아바지, 죄송합네다. 고향으로 모셔 묻어드려야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습네다."
장판수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울고 또 울며 밤을 보낸 후 다시 용골산성으로 길을 재촉했다. 마침내 힘겹게 장판수가 돌아온 용골산성의 분위기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이게 다 모문룡, 그 되놈장수 때문이라우."
피죽 한 그릇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모습을 한 늙은 나뭇꾼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간의 사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아니 그 놈이 뭔데 성을 버리고 나오라고 하는기야!"
"애초에 그런 놈에게 양식을 사다가 먹은 게 잘못된 거라우요."
장판수가 귀동냥으로 사태를 파악해 보니 인근에서 용골산성의 양식과 무기를 구하기 어려웠던 정봉수가 모문룡에게 후금군에게서 노획한 말과 소를 팔아 양식을 샀고 모문룡은 이를 빌미로 자기 마음대로 조선민병을 부리려 한다는 것이었다.
정봉수는 어차피 외부의 지원 없이는 용골산성을 더 이상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에 모문룡의 말을 들으려는 쪽이었지만 성안의 민심은 그와 정반대였다. 비록 전염병까지 돌아 죽는 사람이 속출할 정도로 성안의 사정은 어려웠지만 수 차례에 걸쳐 후금군을 격퇴한 지라 자신감만은 충만하였다.
그러던 중 모문룡의 부하들이 수시로 성안에 들러 간섭하며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민병 중 하나를 처형해 군문에 매달고 일부 사람들을 명나라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섬으로 데리고 가버리자 성안은 더욱 소란스러워 졌다.
"이미 정장군이 성을 모문룡에게 넘긴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 성을 지킬 이유가 없어졌소! 모두 한 번에 나가 버립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은 용골성을 등지고 나가 버렸고 장판수도 이에 휩쓸려 정처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인근에 있던 모문룡의 명나라 군사들은 얼마 후,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비어버린 용골산성으로 들어갔다.
사실 명나라 군사들은 섬에서 나와 주둔할 근거지를 찾았고 용골산성의 견고함을 알게 되자 정봉수를 기만해 조선민병을 내쫓을 계책을 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들이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후금군이 성안의 어지러움을 눈치 채고서는 일시에 기습해 들어왔다. 모문룡의 생각과는 달리 명나라 군사들은 조선민병과 같지 않았다.
헛되이 포를 쏘며 얼마간 저항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후금군의 기세에 눌려 도주하였고, 수천 명의 명나라 병사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제 풀에 밟혀죽기도 하며 후금군에게 도륙 당했다. 마침내 용골산성은 명나라 군사들의 시체를 쌓아둔 채 후금군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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