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런' 대통령으로 남으렵니까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68) 노 대통령에게 드리는 글

등록 2005.01.11 13:08수정 2005.01.1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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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산골 서생의 상소문


안녕하십니까? 노 대통령님!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글을 써야 옳을지, 잠자코 침묵하면서 내 일에만 몰두하면서 사는 게 옳을지…. 한참 고민하다가 그래도 이 시대의 한 문사라면 하고 싶은 말은 드리는 게 옳다는, 그리고 지금이 그 알맞은 때라는 판단으로 감히 이 글을 드립니다.

지난날 그 무섭던 왕조시대에도 선비들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소문을 올렸다는데, 이 문명 첨단시대에 앞에서는 침묵하면서 뒤로 딴죽을 거는 것은 비겁하다는 생각도 들어 아주 편한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

먼저 저를 간단히 소개 올리면 지난해 33년간 근무하던 교단을 명예퇴직하고 서울을 떠나 지금은 강원도 산골마을에서 텃밭도 가꾸며 나무를 해다가 군불 지피면서 틈틈이 글줄이나 쓰는 한 서생이요, 또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언젠가 한번 노 대통령님을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재임 중에는 바쁘실 것 같아서 퇴임 뒤 부산자갈치 시장 횟집에서나, 제 집과 가까운 주문진 어시장 좌판 같은 곳에서, 서로 격의 없이 소주잔을 나누면서 이런저런 세상사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 뒤 그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올려서 퇴임 대통령의 진솔하고 담박한 얘기를 네티즌들에게 전해 드리면 얼마나 좋아할까 그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글에서 "노 대통령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쓰고 싶었습니다.

지난해 3월 탄핵 반대 촛불집회
지난해 3월 탄핵 반대 촛불집회오마이뉴스 권우성

"정말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지난해 3월 12일, 그 무렵 저는 권중희 선생과 여러 네티즌들의 성원으로 백범 선생의 암살 배후를 밝히기 위해 워싱턴 근교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 갔다가 그곳 현지 동포들의 도움을 받으며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 즈음 저희는 여비를 한 푼이라도 더 아낄 양으로 한 동포가 주선해 준 워싱턴 DC에 있는 미주동포협의회(NAKA) 사무실에서 신세지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저희가 워싱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떠나는 날이었습니다. 그동안 저희를 도와주었던 자원봉사자 동포들이 마지막 봉사로 공항까지 데려다 주고 짐꾼 노릇을 하려고 숙소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간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면서 푸석푸석한 얼굴에다가 눈이 부어 있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고국 국회에서 탄핵 통과 중계를 보고는 비분강개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날 오후에 워싱턴에서 탄핵 반대시위를 계획 중이라면서, 우리에게도 동참하자면서 출발을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비행기 표는 이미 여러 달 전에 끊어두었고, 로스앤젤레스에서 다른 일정이 있었기에, 또 먼 이국에서 말도 서툴고 지리도 몰라서 저희는 그대로 돌아왔습니다만 그들은 공항에서 출발 전까지 고국에 돌아가거든 꼭 탄핵 반대운동에 참여해 달라고, 저에게는 그런 요지의 기사를 써달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였습니다.

워싱턴 댈러스 공항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필자 일행을 환송하고 있다.
워싱턴 댈러스 공항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필자 일행을 환송하고 있다.박도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곳 동포들도 탄핵 반대 얘기가 초점이었고, 곧 있을 미주 LA 동포 탄핵 반대시위 계획으로 매우 분주했습니다.

다음날 한 음식점에서 저희 일행 환영회가 있었는데, 정작 환영의 말보다 고국의 대통령 탄핵 반대 성토장이 되었고, 특히 LA 노사모 회원들이 몰려와서 거기 모인 동포들과 우리 일행에게 탄핵 반대 대열에 동참해 달라고 몇 차례나 고개 숙여 절하면서 부탁하고 부탁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들의 열정과 정성에 놀랐습니다. 국내에 있는 국민이라면 몰라도 해외에 있는 젊은 동포들이 왜 저토록 탄핵 반대에 열성인지를…. 국내라면 나중에 한 자리를 얻기 위한 걸로 오해도 할 수 있을 테지만, 수륙만리 이국 땅에서 저토록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걸 보고, '노무현이라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무엇이 저들을 저토록 열광하게 만들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들은 모두 '시간은 돈'이라는 미국 사회에서 대단히 바쁜 이민생활을 하고 있는 동포들입니다. 과거 어느 대통령이 이런 지지를 받았겠습니까? 정말 그 지지와 열정이 불가사의했습니다.

노 대통령, 당신이 돈이 많아서 그들을 매수했습니까? 당신의 인물이 뛰어나서 그들이 매료당했습니까? 당신의 조직이 탄탄해서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준 것입니까?

돼지저금통이 차떼기 뭉칫돈을 이겼다

그리고 귀국 후, 광화문에서 벌어진 촛불 물결에 동참한 젊은이의 얼굴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제 돈으로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와서 제 돈으로 초를 사고 목이 터져라 노래 부르고 함성을 지르는 그들을 보았을 때, 저는 노무현 대통령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라고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왜 그토록 당신을 지지하고 국회에서 탄핵이 통과되자 당신을 구하고자 생업도 접은 채 거리로 나섰을까요?

저는 당신이 그동안 살아오고 걸어온 길이 신선했기 때문이라고 단정 짓겠습니다. 다선 중진 국회의원도 청문회장에 증인으로 나온 왕회장 앞에서 할 말을 다 못하고 굽실거리는데 촌닭 같은 당신은 단기필마를 탄 돈키호테처럼, 국민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쏟아주었기에 수십 년 동안 묵었던 체증이 확 뚫린 듯 시원했고, 애송이 무명의 국회의원 노무현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망국적 고질병인 지역감정의 구도를 깨트리기 위해 막대기를 꽂아도 당선될 정당도 팽개치고, 기반도 없는 낯선 땅에서 또 돈키호테처럼 도전하였기에 비록 국회의원에 낙선했지만 많은 국민들은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대선을 앞두고 후보로 나섰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차기나 차 차기를 염두에 둔 제스처로 봤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은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당히 후보자가 되었고, 그리고 만난을 무릅쓰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노란 황색물결과 돼지저금통의 힘이었습니다. 코 묻은 돼지저금통이 차떼기 뭉칫돈을 이긴 세계 선거사상 기념비가 될 만한 대첩이었습니다.

지난 대선 당시 유세 현장에서 희망돼지 저금통을 전달 받은 노무현 대통령
지난 대선 당시 유세 현장에서 희망돼지 저금통을 전달 받은 노무현 대통령오마이뉴스 권우성
노무현 개인을 보고 선택한 것이 아니다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것은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의 소망이지
노무현 개인을 보고 선택한 것이 아닌 것이다.

바로
힘없고
가진 것 별로 없고
학벌도 없는 사람들을 위한
개혁이 되길 바라서이지
수구 세력과
꿍짜작하라고 찍은 것은 아닌 것이다.

지금
청와대나 열린우리당은
또 하나의 기득권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귀에는 주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 'ID 백두대간'


한 네티즌의 댓글이 그들의 마음을 요약 대변한 듯하여 소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해방 60년이 지나도록 실타래처럼 꼬인 이 나라를 당신이 단기필마를 타고 쾌도난마를 휘두르며 시원스럽게 풀어달라고 돼지저금통을 만들어주고 거리를 온통 황색물결로 뒤덮게 했던 것입니다.

개혁은 의외로 쉽다

흔히들 '개혁은 혁명보다 더 어렵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개혁은 그리 어렵다고 보지 않습니다. 기존의 법이나 제도를 과감히 뜯어고치는 것을 개혁으로 아는데, 그것도 개혁의 한 방법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면서도, 앞서 해야 하고 마음먹기에 따라서 쉬운 것은 '사람'을 가려 쓰는 일입니다.

대통령 혼자 나라를 다스리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에게는 국가의 중요한 자리를 대부분 임명하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 자리마다 바르게 살아오고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을 골라 앉히기만 하면 그 사람들이 자기 권한 내의 집단을 바로 할 테니 개혁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하고 제 자리에 돌려놓는 게 바로 개혁입니다.

그래서 대통령 당신은 그 일(사람 가려 쓰는 일)만 임기 내내 줄곧 하면 개혁은 저절로 이루어지고 마침내 당신은 성공한 대통령이 됩니다. 눈을 바로 뜨고 귀를 열어서 바른 사람을 구하고, 그 사람이 소신껏 일하게 하고, 혹 잘못 뽑았다고 판단될 때는 과감히 바꾸고….

아무 말 없이 그렇게만 앞으로 3년 하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달라질 겁니다. 그렇게만 하면 국민들은 당신에게 더 박수를 보낼 것이며, 더 큰 힘을 실어줘서 잘못된 법과 제도도 과감히 고치고 청와대를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2년 동안 당신이 보여준 통치력은 지지자들의 뜻과는 다른 점이 너무 많았습니다. 숱한 예가 있지만 이번 교육부총리 일만 예를 들겠습니다.

산골의 농사꾼들까지도 교육 개혁을 말할 정도로 교육현실은 심각한 정도입니다. 지난 번 대입수능 부정사건을 보십시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기성세대의 부정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습니까?

요즘은 도시뿐 아니라 시골 아이들조차도 하루 종일 학원을 전전하고, 일부에서는 이런 교육을 불신한 끝에 일찌감치 외국으로 내보내서 '기러기 아빠'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사회문제를 일으킨 현실에 이미 부도덕성으로 용도 폐기된 인물을 발탁해 놓고 '개혁'의 적임자니, '대학은 산업'이니 말도 되지도 않는, 소도 웃을 말로 덮어버리려고 하니 이 나라 백성들은 모두 바보 등신으로 여긴 게 아닙니까?

저는 지금 지난 1월 5일 신문에 보도된 내각명단에서 출신대학 별로 통계를 내 보고 있습니다. 20분 중 13분이 서울대학교 출신(한 분은 육사와 중복)이군요. 학벌 없는 사회를 만든다면서 이럴 수 있습니까? 다른 대학이나 지방대학 출신자들, 대학을 나오지 않는 사람 중에서는 쓸 만한 사람이 없던가요?

말과 행동이 같아야 백성들이 믿고 따를 게 아닙니까? 정말 드리고 싶은 말 많지만 너무 길면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이만 줄입니다. 마무리 말로 한 마디만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퇴임 대통령이 여러 분 계십니다. 몇 분이나 백성들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을 받고 계십니까? 노무현 대통령도 퇴임 후 국민들로부터 존경은커녕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그저 그런 대통령으로 남으렵니까?

아니면 흐트러진 나라를 반듯하게 세워놓은 대통령으로, 누가 말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다시 돼지저금통을 모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념관을 세워주는 대통령으로 남으렵니까?

이제 3년 남았습니다. 한때 백성들의 열광적인 사랑은 그것이 처절한 분노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말로 제 글은 마무리합니다.

성공한 대통령으로 퇴임 뒤 소주잔을 나누면서 허심탄회하게 대담할 기회가 있기를 간곡히 바라면서….

2005년 1월 11일

강원도 횡성군 안흥 산골에서

박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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