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머물 곳이 없어진 장판수는 고향인 용천으로 가려했지만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난리통에 모조리 평양으로 갔다는 소식을 인근에 주둔했던 병사들에게서 듣고서는 정혼이 써준 소개장을 상기하며 평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평양에서 무예를 익히며 가족들을 만날 수도 있는 일이기에 장판수는 약간의 기대감도 가질 수 있었다. 장판수는 이진걸의 집을 며칠 동안 물어물어 찾아가 소개장을 내밀었다.
“니래, 갑사가 되고 싶다면 결코 날 잘 찾아온 것이 아니다.”
장판수가 가져온 소개장을 다 읽은 이진걸은 피식 웃으며 맥 빠지는 소리부터 내뱉었다. 이진걸은 삼십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겉보기에는 그보다 더 늙어 보였다. 장판수의 첫인상에 삐쩍 말라 힘도 제대로 못 쓸 듯이 보이는 이진걸은 그리 유능해 보이는 스승은 아닌 듯 했다.
“니래 잘 하는 게 뭐 있디?”
“…돌팔매질을 좀 할줄 압네다.”
이진걸은 낄낄거리며 웃더니 타구를 들어 가래침을 타악 내뱉었다.
“그럼 투석군이나 하지 갑사는 무슨 갑사야? 갑사가 되려면 말이디… 활질을 잘해야 하는 기야. 그런데 내래 칼은 좀 써도 활질은 잘 가르칠 자신이 없디. 활은 니 스스로 깨치라우.”
장판수는 이진걸의 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길을 잘못 찾아 왔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선뜻 자리를 박차고 나갈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다.
“표정이 와 기런기야? 니래 용골산성에서 싸운 적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활 쏘는 기래 눈대중으로 봐 왔을 거 아니야? 활은 내 것이 있으니 그것으로 연습하라우. 공으로 여기서 밥 먹지 않으려면 하다못해 활질로 사냥이라도 해야 될 거 아니네?”
제자로 받아들인다는 말인지는 알쏭달쏭 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장판수로서는 일단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활에 서툰 장판수는 번번이 사냥에서 허탕을 치기 일쑤여서 나무를 해다가 장에 파는 것으로 대신하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진걸의 핀잔을 받기 일쑤였다.
“쯧쯧쯧… 뭐가 이렇디? 기래 가지고 서니 언제 활을 배우갔어?”
정혼의 말과는 달리 이진걸에게 무예를 배우러 오는 다른 사람도 볼 수 없었고, 그렇다고 장판수에게 무예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도 아니었다. 이진걸은 평소에 빈둥거리기만 했는데 가끔씩 사람이 찾아와 이진걸을 찾으면 무엇을 하는 지 며칠간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것만 해도 장판수로서는 얄미운 일인데, 돌아올 때는 술에 거나하게 취해 있곤 했다. 참다못한 장판수는 이진걸에게 활 다루는 법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말만 되돌아 올 뿐이었다.
“이런 육시럴, 내래 도저히 여기 못 있갔어.”
석 달만에 장판수는 화를 내며 이진걸의 곁을 떠날 작정을 했다.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야겠다 싶어 이틀 전 밤에 나간 이진걸을 기다렸는데 오후 늦게 서야 술이 덜 깬 채 집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내래 이만 가 보갔시오. 어찌 되었간 그간 고마웠습네다.”
이진걸은 장판수의 화난 얼굴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와 웃습네까!”
“야 이놈아, 제대로 된 갑사 되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았느냐! 쓸만한 놈인 줄 알았더니 네 놈 하는 싹수를 보니 틀렸구나!”
그 말을 하는 동안 흐리멍덩하게만 보였던 이진걸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것은 평소에 알던 이진걸의 눈빛이 아니었고 장판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마음이 들었다. 장판수는 이진걸의 발아래 엎드려 잘못을 빌었다.
“일어나라우. 그리고 방안에 있는 목검을 두 개 집어오라우.”
장판수가 목검을 가져와 주자 이진걸은 자신에게 한 번 덤벼보라 소리쳤다. 장판수는 목검을 쥔 채 잠시 머뭇거렸다. 자기 입으로 칼에는 자신 있다고 한 이진걸이 아니었던가.
“날래 덤비라우!”
장판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목검을 들어 이진걸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장판수의 눈앞이 깜깜해지며 불빛이 번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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