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았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69) 겨울 이야기 (3)

등록 2005.01.13 00:34수정 2005.01.1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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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강 지류의 얼음장


올 초겨울은 예년에 없이 따뜻하여 기상대 생긴 이래 가장 기온이 높은 이상난동이라고 법석이더니 지난 연말부터 불어 닥친 한파가 2주 이상 사납게 떨치고 있다.

강원 산골마을은 서울보다 5도 이상은 더 추운 것 같다. 바깥에 나가면 정신이 바짝 들도록 차고 하늘이 유리처럼 맑고 깨끗하다. 이곳에서 첫 겨울을 보내고 있는 필자는 요즘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집안에만 움츠리고 있다.

하지만 구멍가게 하나 없는 마을이기에 우체국이나 은행을 가거나 목욕 이발을 위해, 생필품을 사고자 중무장을 하고 이따금 장터마을을 운동 삼아 다녀오곤 한다. 그때마다 동네 앞 주천강 지류 시내를 지나는데 지난 연말부터 아주 잘 얼었다. 그런데 썰매나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 이 좋은 얼음장에 찬바람만 불고 있다.

주천강 지류의 얼음장
주천강 지류의 얼음장박도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 악동들은 추운 날일수록 더 좋았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철사 줄로 만든 손 썰매를 가지고 무논이나 개천 하수도 가리지 않고 얼음만 보면 썰매를 탔다. 솜을 넣은 바지저고리에 귀에는 토끼털로 만든 귀마개를 하고 밥 때도 잊어가면서 얼음을 지쳤다. 살얼음을 지치다가 빠져서 옷을 다 적셔도, 그래서 어른에게 야단을 맞아도 슬그머니 썰매를 가지고 또 얼음판을 찾았다.

요즘 그 흔한 스케이트는 어쩌다가 도시에서 방학을 맞아 내려온 아이들이나 있었지 우리 악동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초등학교 상급학년이나 중학생이 된 무렵에는 그 스케이트를 모방하여, 우리들이 손수 ‘발스케이트’라는 걸 만들었는데, 앞부분에는 송판에다 못 머리를 박고, 뒤에다가는 철사를 붙인 막대기를 이어서 고무줄로 칭칭 발을 감아서 탔다.


동네 가까운 무논은 물론이요, 멀리 샛강까지 원정도 가서 얼음이 있는 곳은 아이들로 붐볐다. 봄이 무르익어 연못에 얼음이 완전히 녹아야 썰매를 헛간에 넣었다.

이 겨울 들어 주천강 지류 얼음판을 여러 번 지났지만 썰매 타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썰매를 타지 않았느냐고 어른들에게 여쭤보았더니, 지난날에는 이곳도 썰매 타는 아이들이 많았다면서 당신들도 겨울 한철을 이 시내 얼음장에서 보냈다고 했다.


대체 그 많았던 아이들이 어디로 갔을까? 그 답은 곧 풀렸다. 시골에 아이들이 없다. 이곳 안흥면만 해도 1970년대에는 1만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3천명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거기다가 몇 명 있는 아이들도 학원에 다니느라 얼음판에 나올 틈이 없나 보다. 이 적은 장터마을에도 보습학원 피아노학원 등이 있어 아이들을 집집마다 실어 나르느라고 노란 봉고차가 분주히 쏘다니고 있다.

하교길에 아이들이 책가방을 팽개친 채 얼음장에서 놀고 있다
하교길에 아이들이 책가방을 팽개친 채 얼음장에서 놀고 있다박도
필자의 마지막 스승 이오덕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필자가 요지만 뽑음).

일하기와 가난과 자연

사람이 사람답게 자라나려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삶이 있는데, 그것은 일하기와 가난과 자연 - 세 가지다.

첫째는 일하기인데, 사람은 일을 해야 살 수 있고, 일을 해야 사람이 된다. 일을 해야 사람다운 태도를 가지게 되고 일을 해야 사람다운 생각을 하게 되고 사람다운 감정을 가지게 된다. 세상의 모든 이치도 일하는 가운데서 깨치고 찾아낸 것이 가장 올바르고 확실한 앎이다. 몸과 마음의 건강도 일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일이 즐겁고 일이 공부가 되려면 그 일이 자연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따라 자연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이다. 옛날부터 동양이고 서양이고 자연보다 더 큰 스승은 없었다.

자연을 배우고 자연을 따라 살면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것이 제대로 된다.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비로소 아름답고 참된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 반대로 자연을 배반하고 거역하면 사람은 병들고 스스로 망한다. 자연이 없는 교육은 죽음의 교육이고, 자연을 떠난 삶은 그 자체가 죽음이다.

자연 속에서 땀 흘려 일하며 산다고 하면 누구나 가난을 연상할 것이다. 그렇다. 일과 자연 말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가난의 체험이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야 사람답게 된다. 가난해야 물건을 귀하게 쓰고, 가난해야 사람다운 정을 가지게 되고, 그 정을 주고받게 된다. 먹고 입고 쓰는 것 모든 것이 넉넉해서 흥청망청 쓰기만 하면 자기밖에 모르고, 반드시 망한다.

사람이 게을러지고, 창조력이고 슬기고 생겨날 수도 없다. 무엇이든지 풍족해서 편리하게 살면 사람의 몸과 마음이 병들게 되고, 무엇보다도 자연이 다 죽어 버린다. 그러니 사람이 망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반드시 불편하게, 곧 가난하게 살아가야 한다.

가령 백에 한 사람이라도 세상을 바로 보고 옳게 살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역사는 언제나 깨어난 이런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 앞장서 이끌어 왔으니까. 다시 한 번 짚어 보지만, 오늘날 우리 교육에는 일과 자연과 가난이 완전히 없어졌다. 세 가지 가운데 그 어느 한 가지만 없어도 참된 사람 교육은 될 수 없는데, 이 세 가지가 죄다 없으니 무슨 교육이 되겠는가?

지금의 교육은 이 세 가지를 싹 쓸어 없앤 자리에 살벌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세우고 그 속에 아이들을 가두어 놓고는 책만 읽고 쓰고 외우고 아귀다툼을 하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무슨 수로 아이들이 그 목숨을 지키고 가꾸어 가겠는가.


주천강 지류의 이 좋은 썰매장에 아이들이 없는 것은 이 산골마을에 아이들이 없는 탓이요, 몇몇 남아있는 아이들도 도시 아이처럼 학원을 간 탓으로 찬바람만 부는 것이다. 이나마 시골에 살면서 도시아이들처럼 공부시키겠다는 시골 엄마들을 나무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이 겨울, 이 썰매장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칠 때 우리 시골도 다시 살아나고 우리의 교육도 제 자리로 돌아오지 않을까?

찬바람만 부는 텅 빈 얼음장을 지나면서 시대에 뒤떨어진 한 퇴역 교사가 골동품 같은 부질없는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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