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시게. 여기 몽학(蒙學)훈도(호조의 정9품 직책)가 누구인가?”
호조의 관원들은 깜짝 놀라 최명길을 맞이했다.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 한참 아래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라 여겼기에 허둥대는 이들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훈도가 허겁지겁 최명길의 앞에 달려왔다.
“이것을 봐 주겠나? 내 아무리 보아도 청국 내지 몽고 글로 보이네만.”
최명길이 훈도 앞에 꺼내든 것은 바로 최만길이 가져온 두루마리였다. 훈도는 두루마리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것은 몽고 글자 같아도 보이지만 그렇지 않사옵고 여진의 글자 같습니다. 이를 해독하는 법은 실전(失傳: 잃어버림)되었기도 했거니와 소인이 미력하여 당장 알 수 없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최명길이 알았다며 두루마리를 접으려 하자 혹시나 이러한 사실로 인해 자리에서 내침이라도 당할 것이 두려웠던 훈도가 급히 덧붙였다.
“교서관(경서의 인쇄와 제사 때 쓰는 향과 축문, 도장에 글씨를 새기는 일 등을 담당한 관청)에 이런 글을 잘 아는 자가 있사온데 제가 알아보라 물어보겠습니다.”
최명길은 알았다며 두루마리를 두고 가려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아니 그렇게 다른 글을 잘 아는 자가 어찌 교서관에 있단 말인가? 그 자의 이름을 아는가? 내 한번 직접 만나보고 싶네만.”
“그, 그것이 말이옵니다. 미천한 자라서.”
훈도가 당황스러워하며 말끝을 흐리자 최명길은 더욱 궁금해졌다.
“미천한 자라도 재주가 뛰어나면 성상께 아뢰어 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너나 내가 가릴 일이 아니다.”
훈도는 주위의 눈치를 보더니 최명길에게만 들릴만한 목소리로 답했다.
“실은 교서관의 창고지기 계집이옵니다.”
그 훈도는 평소에 창고지기 나인에게 도움을 많이 받는 터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더 모른다는 사실까지는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최명길은 훈도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 다시 창고지기 나인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계화라는 계집이옵니다.”
최명길은 그 길로 교서관에 가 계화를 찾았다. 얼마 뒤 작은 체구에 다부져 보이는 눈매를 가진 나인 계화가 고개를 숙이며 최명길에게 왔다. 겨우 20세 정도로 보이는 나인이었기에 최명길은 속으로 놀라며 두루마리를 펼쳐 보았다.
“넌 이 글을 알겠느냐?”
계화가 한번 살펴보더니 대답했다.
“예, 여진의 문자이옵니다.”
“여진의 문자?”
“그러하옵니다.”
사역원에 여진어를 아는 역관이 있기는 하나 그 문자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없었거니와 최명길은 여진 문자가 있다는 말도 낯설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것을 풀어 읽을 수 있겠느냐?”
“흐린 글자가 있기에 정확하게 읽기에 그렇사옵니다만......”
계화는 두루마리에 쓰인 글을 풀어 읽어 내려갔다.
“장백산 동남 부꾸리 아래 못이 있었으니 부래호라 한다. 세 선녀가 내려와 이 못에서 미역을 감고 있는데 큰언니는 은석륜, 둘째언니는 정석륜, 셋째는 불석륜이다. 그들이 떠나려는데 하늘에서 까치가 날아와 물고 있던 붉은 과일을 셋째의 옷에 떨어트렸다. 불석륜은 과일을 입에 물었는데 그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모두들 옷을 입고 하늘로 돌아가려 하는데 셋째만 돌아 갈 수 없었다. 큰언니와 둘째 언니가 불석륜의 몸을 만져 보고서 하늘이 너에게 아기를 점지해 주었으니 아이를 낳은 후에 몸이 가벼워져 가히 돌아갈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불석륜은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체격이 괴이한 한 남자아기를 낳았다....... 뒤는 글이 끊어져 있사옵니다.”
계화가 두루마리를 다 읽자 최명길은 허허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사실 최명길은 범상치 않은 꿈을 꾸었기에 속으로는 혹시 이 두루마리가 청나라의 기밀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하여 의심해왔던 터였다.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가 했더니 이것은 그냥 이야기가 아니더냐. 그런데 넌 어찌 그리 여진말을 잘 아느냐?
“어려서 그곳에 산 적이 있사옵니다.”
최명길은 대견하다는 듯 계화를 보며 두루마리를 말아 건네어 주었다.
“상으로 이것을 너에게 주마.”
계화는 고개 숙여 감사함을 표시했고 최명길은 미루어 둔 집무를 보기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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