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축시(丑時) 무렵, 인조는 몇몇 신하들과 함께 호위무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말에 올랐다. 남한산성에 남아 있느냐 강화도로 가느냐의 문제로 논쟁을 벌이던 대신들은 대다수 남겨 둔 채 인조와 몇몇 대신만이 강화도로 가기로 한 것이었다.
동시에 인조의 행차가 겨우 보일만한 위치에서 장판수가 거느린 호위병들이 뒤를 엄호하며 따라나섰다. 하늘에는 언제부터인가 눈발이 세차게 흩날리고 있었다.
‘지랄 같은 날씨에 길을 나섰군,’
장판수는 속으로 욕을 곰씹으며 어가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다. 길은 눈 때문에 미끄럽기까지 해 말 위에 탄 인조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다. 급기야 언 길만 지나갈 양으로 인조가 말 위에서 내려 걸으니, 추위에 떨며 걷는 모습이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몰래 빠져 나가는 길이라 달마저 먹구름에 가린 새벽에 호롱불조차 없어 걷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었다. 뒤따르는 장판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어이쿠!”
결국 인조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짐과 동시에 옆에서 부축하던 호위무사도 옆으로 쓰러졌다. 그런데 장판수가 보기에 호위무사의 쓰러짐은 이상했다. 인조가 머리를 들고 엉덩방아를 찧는 것과는 달리 호위무사는 머리가 그대로 땅바닥에 닿아 버리는 모양새였다.
“기습이다!”
바람 소리도 없는 화살이 인조를 겨냥하고 날아온 것이었다. 또다시 다른 호위무사의 팔에 짧은 화살이 꽂혔고 대신 하나가 등에 화살을 맞고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져 버렸다. 장판수가 이끄는 호위군들은 재빨리 흩어져 인조를 가운데 두고 둥글게 둘러섰다. 주위를 날카로운 눈으로 살펴보던 장판수는 수풀사이에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서는 환도를 든 채 돌진해 나갔다.
‘휘익!’
화살이 귀신처럼 수풀사이에서 나왔고 이를 예측한 장판수는 칼로 이를 쳐내고서는 수풀로 뛰어들었다. 장판수의 솜씨에 질려버렸는지 수풀 속에 숨어 있던 검은 옷을 입은 자가 혼비백산하여 허둥지둥 뛰쳐나왔다.
“네 이놈!”
장판수는 단 칼에 검은 옷을 입은 자를 베었지만 곧 뒤에서 살기를 느꼈다.
‘늦었다!’
순간 세찬 소리와 함께 수풀 속에서 칼을 든 사람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뒤에서 보던 서흔남이 활을 쏘아 장판수를 구한 것이었다.
“으악!!”
이번에는 호위군 하나가 칼을 맞고 쓰러졌고 사방에서 검은 옷의 괴인들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그 사이 대신들은 인조를 보살피기는커녕 남한산성 쪽으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두청이 장판수에게 소리쳤다.
“여기는 우리가 맡을 것이오니 전하를 모셔 가소서!”
장판수는 그때까지도 땅에 주저앉아 있는 인조를 들쳐 업고서는 숲 속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장판수의 귓전에서 병장기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쟁쟁 울려왔다.
‘젠장! 저 놈들 아주 단단히 작정하고 왔구먼 기래!’
한참을 내달리다 보니 더 이상 뒤쫓는 자들도 없거니와 힘이 들기도 하여 장판수는 인조를 조심스레 내려놓고서는 숨을 골랐다.
“전하, 잠시 쉬어가겠사옵네다.”
인조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우러러 받드는 임금이지만 지금은 장판수에게 목숨을 맡겨둔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전하,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겠사옵네까?”
인조는 일어나 걷더니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어쩌면 엉덩방아를 찧을 때 허리를 다쳤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 가지가지 하는구먼.’
속으로는 슬며시 짜증이 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임금은 임금인지라 장판수는 다시 인조를 들쳐 업고서는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장판수가 땀범벅이 되어 남한산성에 도착했을 때는 대신들이 도망쳐 오는 것을 보고 눈치를 챈 몇몇 내관들이 남몰래 성문 밖으로 나와 인조의 안위를 염려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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