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24회

등록 2005.02.22 07:23수정 2005.03.12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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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돈


제 32 장 몽화(夢花)

사내는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가 처리할 일은 아직도 많았지만 그를 기다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더구나 이번 기회를 놓치면 사내는 정말 후회할는지 몰랐다. 그가 장안을 홀로 떠났다는 말을 듣는 그 순간부터, 그리고 그가 산서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사내는 그를 만나려고 작정했다. 그의 곁에 어떠한 인물이 있던 간에 그를 만나는데 장애가 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오직 그와 자신 둘만이 있는 곳에서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는 하나 뚜렷하게 어떤 결정을 하고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생각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파악된 것은 바로 반각 전이었다. 그가 신검산장을 향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내는 의외라 생각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공교로운 우연이었다.

예상대로라면 그는 내일 이 시각이면 이곳을 통과할 터였다.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신검산장을 향하고 있다면 반드시 이곳을 지날 터였다. 하루 동안 그는 자신이 어떻게 그를 대할 것인지 반드시 결정을 해야 했다. 그것이 어리석은 결정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이미 어리석은 결정을 한 그의 부친은 가장 큰 어리석은 결정으로 인하여 폐인(廢人)이 되었다. 자신마저 어리석은 결정을 할 수는 없었다.

‘이름이 명(明)이라고 했느냐? 이 아저씨와 이름이 같구나.’
‘아버지께서 장군을 닮으라고 제 이름을 그렇게 지었대요.’
‘네 부친은 훌륭하고 용맹한 분이시다. 헌데 이놈. 천하에 다시 없을 무골(武骨)이구나.’
‘무골이 무엇이죠?’
‘무공을 익히기 가장 적합한 신체이자 훌륭한 장수(將帥)가 될 근골(筋骨)이다.’
‘저는 커서 장군같이 되고 싶어요.’
‘너는 이 아저씨보다 더욱 뛰어난 대장군(大將軍)이 될 수 있을게다.’
‘아버지께서는 아저씨보다 더 훌륭한 장군은 없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장군의 말씀과는 달리 천하의 무골이 아닌가 봐요.’
‘왜지?’
‘저는 왼손잡이에요. 왼손잡이는 검을 익히기 어렵대요. 아버님이 가르쳐 주신 검법조차 엉성하게 펼치게 되고 엉망이 되어 버리는걸요. 왼손잡이를 위한 검법같은 건 없대요.’
‘너는 너의 장점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바보같은 아이로구나. 물론 왼손으로 오른손을 위주로 한 검법은 익히기 어려울 게다. 하지만 네가 익힐 수 있다면 너의 검은 똑같은 검법을 펼치는 보통 사람의 검보다 더욱 무섭고 막기 힘들 게다.’
‘하지만….’
‘너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늘은 인간에게 각기 다른 장점을 주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태반이다. 너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으냐?’
‘아니예요. 절대로 아니예요.’
‘그렇다면 지금 아저씨를 향해 검을 들고 서 보렴.’

사내의 나이 열두살 때의 일이었다. 자신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우상이 되어 버린 장군과의 만남에서 사내는 꿈이 현실로 다가옴을 느꼈고 사물을 보는 눈이 떠졌음을 알았다. 사내의 우상인 그 장군은 자신에게 길을 열어 주었고, 사내는 지금 천하제일의 검수가 되었다. 사내는 은혜를 모르는 자가 아니다.

하지만 만나고자 하는 장군의 아들은 자신과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아니 피할 수 없이 맞서야 하는 상반된 길을 걷고 있었다. 결정해야 할 시간은 많았지만 이미 결정을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내는 검을 잡은 자였고, 사내가 기다리고 있는 그도 검을 잡은 자였다. 검을 잡은 자는 대답도 검으로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결정도 끝내 검이어야 했다.


사내의 이름은 강명(姜明)이었고, 그의 우상인 장군의 이름은 담명(曇明)이었다.

이미 메말라 떨어지는 낙엽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맨몸을 드러낸 나무들은 우중충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고원(高原)이 많은 산서성의 지리적 특성은 초겨울로 접어드는 이 시기에는 황량한 느낌을 갖게 했다. 이제 얼마 후면 이곳에도 눈이 내려 하얀 세계로 변할 것이다. 대지는 얼어붙고 살점을 에일 것 같은 바람만이 이 황야를 떠돌 것이다.


다관(茶館)이 보인 것은 마지막 인가(人家)를 지난 지 거의 다섯시진만이었다. 건량과 육포로 대충 허기는 면하고 있었으나 따뜻한 온기가 그리웠다. 급한 마음에 관도를 벗어난 것이 초행길을 더욱 어렵게 했지만 그나마 이런 외진 곳에서 다관을 만난 것은 다행이었다. 풍광이 수려하고 번화한 곳에서는 차만을 파는 다관(茶館)과는 달리 이런 외진 곳에 있는 다관이나 다점이라고 부르는 곳은 본래 차를 파는 곳이지만 간단한 식사와 술도 갖추어져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는 말을 다점의 입구에 매어 놓다말고 화려한 꽃무늬 장식이 있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외진 곳에 저런 마차가 서 있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저렇게 화려한 마차라면 의당 관도를 달려야 마땅한 일이었다. 마차를 끄는 말 역시 자신이 타고 온 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순백색의 대완마(大宛馬)였다. 그 마부석에는 육순 가량의 왜소한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는지 졸고 있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오늘은 손님을 받지 않는뎁쇼.”

그가 말을 매어 놓고 다점 안으로 들어가려는 때에 문을 열고 나와 모습을 보인 촌노가 손을 비비며 조심스럽게 한 말이었다. 촌노의 행색으로 보아 이 다점을 운영하는 사람 같았는데 그의 얼굴에는 미안한 표정이 가득했다. 사내는 그 말에 흘끔 다점 입구 위에 걸린 다(茶)가 쓰여진 붉은 천을 바라보았다. 그 붉은 천이 걸려 있음은 영업을 한다는 의미였고, 그것이 내려지면 문을 닫았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분명히 걸려 있었다.

“사정이 있어… 죄송합니다요. 손님.”

촌노는 너무 미안해서 어쩔줄 모르는 표정을 확연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다섯 시진만에 찾은 다점을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사실 허탈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촌노의 얼굴에 미안함과 함께 그냥 가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기색이 떠 올라 있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여기서 얼마나 가야 객점이나 다관을 볼 수 있소?”

그 말에 촌노는 황급히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는 뜻을 표했다.

“말로 빨리 달리면 두 시진 정도면 운성(運城)에 당도하실 수 있습니다요.”

다행스런 표정이었다. 만약 이 손님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간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먼길을 온 것 같기도 했다. 의당 손님을 모셔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지 않겠다고 약조한 이상 받을 수는 없었다. 돈이 문제였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 가끔 찾아 오는 손님을 받으며 생계를 꾸려가는 그에게 있어 석냥 이상으로 보이는 금두(金豆) 앞에서 무력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다점 안에서 영롱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장은 그 분을 모시세요. 그 분은 우리가 기다린 분이에요.”

그 말에 다점의 문앞에 있던 두 사람은 극히 상반된 표정이 떠올랐다. 주인장인 촌노는 매우 기쁜 빛을 띠었고 사내는 의혹스런 기색을 나타냈다. 촌노로서는 너무 기쁜 일이었다. 우선 손님을 그냥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다행이었고, 석냥 이상의 금두에 대한 대가가 곧 끝난다는 점에서 더욱 좋은 일이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따뜻한 차부터 올려드리겠습니다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의혹스런 기색을 보이고 있는 사내가 그냥 가는게 두려운지 아니면 안에 있는 여인들이 기다린 손님이 아니라고 말할까 두려운지는 몰라도 촌노는 서둘러 문을 열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는 풀려 했던 말고삐를 다시 매고는 다점 안으로 들어섰다.

다점은 외향과 같이 아주 작은 곳이었다. 서너 사람이 앉을 정도의 탁자가 다섯 개 놓여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는 한결같이 아름다운 여인 다섯 명이 각기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어 따로 앉을 곳이 없었다. 일행인 듯 보이는 그녀들이 따로 앉아 있는 광경은 신경을 거슬리게 했지만 어차피 먼저 와 있던 관계로 좌석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었다.

특이한 것은 네 명의 여인들의 탁자 위에는 찻잔만이 올려져 있는데 반해 가운데 탁자에 앉은 여인의 앞에는 외진 다점에서는 볼 수 없는 몇 가지 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또 돼지고기로 생각되는 덩어리를 갖은 양념을 해 통째로 구운 것이었는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 있어 건포와 육포로 허기를 메운 사내에게는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담공자께서는 이리와서 같이 드시겠어요?”

여인의 목소리는 특이했다. 목이 약간 쉰듯한 느낌이 드는 그 목소리는 대개의 여자들 목소리보다 탁하고 낮았지만 특이한 매력이 있었다. 아마 목소리에 매력이 있다는 것은 여인의 미모가 워낙 아름답고 독특했기 때문일 것이다. 약간 가는 듯한 눈매와 오똑한 코가 청초한 미(美)를 나타내는가 하면 도톰한 입술과 보조개가 파인 볼은 육감적인 느낌도 들게 했다.

또한 언뜻 볼 때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나이가 들어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은 이 여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고, 이 여인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가운데 탁자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어차피 어딘가에는 앉아야 하는데 어디를 앉던 합석을 할 수밖에 없었고, 합석을 하려면 권하는 사람을 굳이 피할 필요는 없었다. 또한 이들이 자신을 기다린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나는 낮선 사람에게 음식을 대접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소. 얼마 전 아주 맛있는 죽을 얻어 먹었는데 그 속에 독이 들어 있어 고생을 한 적이 있었소.”

여인은 화장을 짙게 하고 있었다. 대개 여염집 여자들이 저렇게 짙은 화장을 하는 것은 일생을 통해 오직 한 번뿐이었다. 혼례식을 올리는 경우가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이렇게 짙은 화장을 하는 여자는 오직 한 부류였다.

기루나 홍루(紅樓)에 있는 여인이거나 노류장화가 그들이었다. 하지만 앞에 있는 여인은 물론 나머지 네 탁자에 앉아 있는 여인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고상한 기품을 가지고 있어 몸을 파는 여인들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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