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쟁기 끄는 소
“아니 그래! 지금 사정이 기런데 어쩌겠다는 거네!”
마구 대드는 장판수 앞에서 전립을 쓴 자가 화로 인해 낯빛이 붉게 된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인즉 아침 일찍부터 왕이 성 안을 순시하고 있으니 복색을 바로하고 군기를 엄히 하라는 위로부터의 명령이 있었다. 급한 일이었기에 대장을 거치지 않고 선전관이 하교를 직접 전하며 이에 부합하지 않는 자들은 성 아래로 내려 보내고 있었는데 장판수가 이에 반발한 것이었다.
“지금 적이 눈앞에 와 있는데 기런게 중요하디?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한 판국에 와 멀쩡한 병사도 밑으로 내려가게 만드네? 니래 정신이 있네 없네?”
“말을 삼가라!”
선전관은 칼을 뽑아들었고 장판수 역시 이에 맞서 칼을 뽑아 들었다. 멀찍이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나이 든 문관 하나가 달려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무슨 불측한 행동인가! 그만두게!”
“내 저놈을 당장 베어 군기를 엄히 하겠다!”
선전관의 엄포에도 장판수는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니래 날 벤다고 캤어? 우선 너부터 벤 후에 할 말이네!”
“그만 두라지 않나!”
문관의 우렁찬 호령에 선전관과 장판수는 모두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문관은 일찍이 홍서봉을 탄핵하고 조정대신들을 간접적으로 비난했다가 김상헌에게 미운털이 박혀 관직에서 쫓겨난 유백증이었다. 남한산성에 온 뒤 군민의 기강을 다잡으라는 의미에서 협수사(協守使)라는 직위를 임의로 부여 받은 처지였지만 상대의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는 강직하고도 저돌적인 성정에 사람들은 그들 두려워하는 터였다.
“내 아까부터 지켜봤네만 저 자의 말이 맞네! 성상께서도 이런 것까지는 원하지 않으실테니 말일세.”
“하지만 저 자는 말직에 있으면서도 내가 대들어 군기를 어지럽게 했으니 중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선전관이 눈치 없게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유백증이 이를 크게 나무랬다.
“어찌 밑에 사람이 옮게 이르는 바를 받아들이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나라의 녹을 먹는 선전관이라며 함부로 칼을 빼어든단 말인가! 그럴 힘이 있거든 오랑캐들 앞에 달려 나가 칼을 뽑아들게!”
장판수조차도 유백증의 앞에서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슬며시 칼을 집어 넣고 자리를 피하려 하니 유백증이 다시 불렀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 장판수라 하옵네다.”
“난 유백증일세. 협수사의 직에 있으니 행여 앞으로 저런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하시게나.”
순간 멀리서 길게 내어뻗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상 전-하 납시오!”
장졸들은 허둥대며 자세를 바로 잡으려 했고 유백증은 한쪽으로 물러서 인조를 맞이했다. 인조는 이서를 대동한 채 성의 이곳저곳을 순시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장졸들을 둘러보던 인조는 문득 장판수에게 눈이 멈추었다.
“옷은 잘 두었는가?”
이 말은 곧 인조가 자신을 구해준 일을 잊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내관이 다시 돌아와 곤룡포를 가져가 버린 판국에 장판수는 무슨 뜻인지 혼란스러워 황공하다는 말만 할 수밖에 없었다.
“날이 추운데 어찌 옷들이 이리 허술한가? 성안의 면화는 얼마나 되느냐?”
그 말에 이서는 이미 면화를 지급하여 옷을 누벼 두었노라 답했고 인조는 미리 물품을 준비한 공을 치하한 뒤, 성 아래로 내려가 무기고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