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중의 병사는 삼림을 지키는 군사까지 합하여 모두 1만 2천여명이고 문무남행관이 200여명, 종실과 삼의사(의원들이 있는 내의원, 전의원, 혜민서를 합쳐 부르는 말)가 100여명, 관원의 노복이 3백여명 도합 1만 2600여명이옵니다. 소금, 장, 면화, 병장기는 갈무리해 놓은 것이 충분하오나 창고에는 쌀과 잡곡이 1만 6천여 석이 있고 이는 겨우 1만명의 한 달치 양식이옵니다.”
말을 마친 이서는 마른기침을 연실 해대었다. 영의정 김류가 이어서 말했다.
“본시 성을 지키던 수어사 이시백은 서성(西城)을 맡았으며 훈련대장 신경진은 동성(東城)을, 대장 구굉은 남성(南城)을 총융사 이서는 북성(北城)을 맡았사옵니다.”
인조는 그때까지도 마른기침을 멈추지 못하는 이서를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서는 왕의 인척으로서 완풍 부원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남한산성을 축조하고 관리한 공이 이제 와서 크게 칭송받았지만 인조에게는 거기에 피붙이로서의 신뢰가 덧붙여져 있었다.
“한 달이라….”
“아뢰옵기 송구하옵니다만 속히 어가를 강화도로 옮겨야 하옵니다. 최명길이 적진에서 돌아와 그들의 강화조건을 말했사오나 저들의 진심은 그런 요구에 있지 않을 것인즉 옥체를 돌보셔야 하옵니다.”
인조는 여전히 그 말을 거부하였다. 방금 전 어전회의에서도 인조가 강화도로 가지 못한다면 세자를 강화도로 보내어 분조(세자를 다른 곳으로 보내어 임시로 다른 조정을 둠)해야 한다는 말에 어린 세자가 울며 자신의 품으로 달려온 일이 있었다. 한편 이서는 자신에게 병이 있음을 들어 원두표를 북문대장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고 인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서와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경들은 물러가시오.”
인조는 대신들과 함께 사관들까지 내어보낸 후 이서를 가까이 오라 일렀다.
“내 긴히 할 말이 있네.”
이서는 고개를 숙인 채 인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새벽에 강화도로 가는 길이 험하여 돌아왔다고는 하나 불측한 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일세. 난 주위 신하들, 특히 서인(西人)들을 믿을 수가 없네.”
이서는 몸을 떨며 말했다.
“불측한 일이라 하옵시면 누군가 전하를 해하려 했다는 것이옵니까?”
이서의 말속에는 무엇인가 짐작이 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듯 여겨졌기에 인조는 더욱 고개를 숙여 말했다.
“내 이를 말하지 않고 그때 있었던 자들에게도 함구할 것을 명한 것은 짐작하는 바가 있기에 그런 것이니라.”
그 시각, 남한산성의 진중에서는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청군이 남한산성 아래 들어와 진을 치기 시작한 것을 보고 병사들이 겁을 집어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총융사께서 이 성을 견고히 쌓았으나 한 가지 모자란 것이 있소이다. 어찌하여 포루를 만들어 놓지 않은 것이오?”
구굉의 말에 이시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성상께서도 일찍이 그 점을 지적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그때 총융사께서는 성에서 포를 쏘면 포연이 성내에 들어차기에 합당치 않아 그리하였다고 답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시백도 당황해하는 병사들 속에서 그 점에 대해 다시 의문을 가졌다. 이시백이 이상하게 생각한 점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남한산성에는 왕이 기거할 수 있도록 행궁이 지어져 있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사실 이는 이서가 왕에게 긴히 청했기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처음에는 화약을 쌓아 놓을 곳이 적당하지 않다고 둘러대었던 총융사가 후에 다른 말을 하고, 난리가 아니라면 행차할 리 없는 이곳에 방이 227칸이나 되는 행궁을 지었다. 오랑캐가 쳐들어올 것을 예상했다고는 하나 성상께서는 애시 당초 강화도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 않았는가?’
남한산성의 외곽은 점차 청나라 군사들의 기치로 메워져 가고 있었고 조선 병사들은 싸우려는 투지보다는 다가올 파국에 대해 마음을 졸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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