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27회

등록 2005.02.25 07:57수정 2005.02.2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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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돈
등이 구부정하고 왜소한 노인이 축 늘어져 팔과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두 사람을 데려오는 광경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의 오른쪽에 끼어 있는 사람은 여인인 것 같았는데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빨리 내 혈도를 풀어주고 놓지 못해요? 나를 이렇게 했다는 사실을 알면 본 궁에서 당신을 가만 놔두지 않을 거예요.”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아직도 계속 그 주둥이를 놀린다면 노부는 너의 아혈마저 짚고 옷을 홀딱 벗겨 놓겠다.”

그 말에 여자는 새파랗게 질리며 황급히 입을 닫았다. 노인의 위협은 너무나 효과적이었다. 노인은 정말로 자신의 아혈을 짚고 자신의 옷을 벗겨 놓을 것 같았다. 억울해서 눈물이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노인은 두 사람을 그와 몽화가 앉아 있는 탁자로 들고 와서는 의자에 걸쳐 놓았다.

“하노인(厦老人). 한 명이 더 있지 않나요?”
“걱정하지 마시오. 그녀는 얌전하게 주방에 있소.”

그들이 말하는 사람은 바로 이곳 주인의 아낙을 말하는 것 일 터였다. 담천의는 노인이 잡아 온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삼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황의(黃衣)를 걸친 보통 체격의 남자였는데 얼굴은 별 특징이 없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이런 인물이 사실 더 무섭다. 그를 몇 번 보더라도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를 기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허나 소리를 지른 여자를 보는 순간 그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대단히 청초한 미인이었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여자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여자는 힐끗 그녀를 끌고 온 노인을 바라보고는 담천의에게 말했다.


“당신은 내 혈도를 풀어주지 않을 건가요?”

그제야 그는 이 여자가 누군지 기억이 떠올랐다. 관왕묘에서 성하검 섭장천의 옆에 모피를 깔고 앉아있던 여자였다. 그때는 금으로 만든 장식을 머리에 꽂고 화려한 장신구가 달려있는 녹의를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엷은 남색의 경장을 입고 장식이 전혀 없는 수수한 차림이어서 빨리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혈도를 풀어줄 이유가 있소? 더구나 당신의 혈도를 짚은 사람은 내가 아니오. 나는 남이 내 일에 끼어드는 것도 무척 싫어 하지만 나도 남의 일에 끼어들기 무척 싫어하오.”

그 말에 그녀의 크고 맑은 눈에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분한 마음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급기야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당신 때문이예요. 헌데 당신은 지금 모른 체 한다는 말이예요?”

그녀는 서러운지 다시 눈물을 떨어뜨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구려.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르오. 우리는 우연히 한번 보았을 뿐이고 당신과는 말 한마디 해 본적이 없소.”

그 말에 그녀는 울음을 그쳤다. 그의 말은 옳았다. 그러고 보니 감정을 키워 온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홀로 대화하고 상상으로 대답을 듣고, 또 다시 속삭인 것은 자신뿐이었다. 자신의 감정이 곧 그의 감정이었을 뿐 다르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 역시 자신을 생각할 것으로 믿었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녀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당신에게 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군요.”

저런 여자는 대개 그녀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으며 자란 경우일 것이다. 사랑을 독차지하고 부모 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그녀를 위해주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여자일 것이다. 몽화는 흥미롭다는 듯 여자를 바라보고는 노인에게 말했다.

“혈도를 풀어주도록 하세요.”

그 말에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스러워 하기는 했지만 시키는 대로 그녀의 마혈을 풀었다.

“풀어주면 조금 시끄러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혈도가 풀린 여자가 팔다리를 한번 휘둘러보더니 갑작스레 허리에서 감겼던 것으로 보이는 연검을 꺼내들며 노인을 향해 쾌속하게 찔러갔다. 여자의 검놀림은 예사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연검은 마치 뱀의 혀처럼 영활하게 노인의 치명적인 목을 노리며 파고들고 있었다.

“죽여 버릴 거야!”

노인은 급작스런 그녀의 공격에 잠시 당황하는 듯 뒤로 밀렸다. 하지만 여자의 연검은 물러나는 노인의 목에서 옆구리로 방향을 바꾸는가 싶더니 아랫배를 노리며 휩쓸어갔다. 말과 같이 진짜 사생결단을 내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앵두 같은 입술을 앙다물고 치명적인 살초만 펼치고 있었다.

“허, 마치 암고양이 같군.”

노인의 몸은 빠르지 않은 가운데 변화가 무궁무진해 보이는 여자의 검초를 아슬아슬 피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 다음 초식에 몸이 꿰뚫릴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지만 기이한 것은 노인의 옷자락 하나 베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여인은 십여 초가 지나자 더욱 약이 오른 듯 갑자기 검초를 더욱 살벌하게 변화시켰다.

츠--팟---!

그녀의 연검에서 수십 송이의 검화가 피어나며 빛을 뿜었다. 그것을 본 담천의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겨우 스물이나 되었을 것 같은 여자의 검법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고 다양한 변식을 가지고 있었다. 명가(名家)의 검법이 아니라면 저런 다양한 변화와 위력을 가지지 못할 터였다.

허나 그것과 같이 노인의 신형도 빨라지기 시작했고 그의 얼굴에서도 상대를 경시하는 듯한 기색이 사라졌다.

“어린 여아가 훌륭한 검초를 배웠구나!”

노인의 말은 감탄이었다. 아무리 좋은 검법이라도 익히는 자에 따라 그 성취가 달라지는 법이다. 더구나 나이도 어린 그녀가 이 정도로 위력적인 검초를 보인다는 것은 그녀의 노력이 적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인은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미 자신이 모시는 주인은 이 여아의 내력을 짐작했을 터였다.

인중(人中)과 목 그리고 가슴을 노리고 파고드는 그녀의 검을 보며 노인의 신형이 좌우로 흔들리더니 쌍수가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그리고 교묘하게 왼팔로 찔러오는 검신을 타고 올라 그녀의 검을 잡은 손등을 내려치자 그녀는 흠칫 놀라며 검을 뒤로 빼내면서 노인의 허리를 베어갔다. 훌륭한 임기응변이었지만 그것은 노인이 노리는 바였다. 검날이 아닌 검신을 타고 오르며 그녀의 연검이 뱀처럼 구부러지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노인의 오른손이 그녀의 검신을 내려쳤다.

챙그랑---!

그녀의 연검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그 충격으로 공교롭게도 그녀의 몸이 뒤로 밀려 담천의의 앞으로 다가 들었다. 담천의의 손이 그녀의 등을 받치자 그녀는 맥이 빠진듯 바닥으로 주저 앉았고, 어느새 그의 발은 옆에 있던 의자를 밀어 그녀가 주저앉는 자리에 가져다 놓자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는 창피를 면할 수 있었다.

“화가 안풀렸다면 잠시 후 다시 하도록 하시오. 나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고, 당신 보다는 이 사람에게 일단 볼일을 봐야겠소.”

그녀는 분했다. 너무나 분해서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이려고 할아버지 일행을 몰래 벗어나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그녀를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자신이 바닥에 널부러지지 않게 배려한 것은 그였다. 그 때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던 몽화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조양(朝陽)의 계명성(啓明星:샛별, 금성)이라는 진진(晋珍) 소저로군요. 조양궁(朝陽宮)에서 어찌 조양의 보배라는 아가씨를 홀로 다니게 할까?”

그녀는 자못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조양궁은 중원의 북동쪽 외곽인 요녕성(遼寧省) 조양(朝陽)에 있는 아름답게 지어진 궁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무림에 있어서는 그 존재가 언제나 부담이 되는 문파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했다. 북방에서 시작한 다른 세가(世家)나 나라(國)와 마찬가지로 이미 한족화되어 북방민족의 특징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아니하였지만 그들은 요녕과 길림(吉林), 흑룡강(黑龍江)을 잇는 중원 북동부를 지배하는 패자(覇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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