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사무소에 걸린 '안흥찐빵은 국민의 찐빵'이라는 플래카드박도
명품의 맛 비법은 며느리에게도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는데, 내 어찌 더 이상의 비법을 천기 누설할 수 있으랴. 이곳 사람들은 이 지방에서 나는 팥과 이 고장여인들의 손맛이라고 한결같이 자랑한다.
찐빵에 얽힌 추억
안흥으로 내려간 뒤 6개월이 지날 무렵, 강원 지역 민방(GTB)에서 나를 초대해 주었다. 아침 시간 생방송이었는데 사전에 작가와 시나리오를 일부러 만들지 않았다. 내 경우는 미리 각본을 만들면 오히려 떠듬거리기 때문이다. 방송진행자가 나에게 왜 하필이면 안흥으로 내려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불쑥 안흥찐빵 때문에 내려왔다는, 전혀 뜻밖의 대답을 하고는, 지난날 한 때 내가 찐빵을 만들어 팔았다는, 쓸데없는 말까지 해버렸다. 방송이 끝난 뒤 아내는 '인연 따라 왔다'고 고상한 말로 답하지 뜬금없는 말을 했다고 충고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어찌하랴.
지난날 열차에서 사과장수를 하던 아가씨가 전력을 숨기고 결혼하였으나 밤중에 잠꼬대로 "사과 사이소"라고 하는 바람에 들통이 났다고 한다. 사람의 전력은 무의식중에 드러나는가 보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늘 그러셨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다보면 별 일을 다 하는데 "도둑질, 화냥질, 빈둥빈둥 빌어먹는 짓 외에는 부끄러울 게 없다"고 했다. 오랜 체험에서 우러난 말로 삶의 지혜가 담긴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1961년 가을, 나는 조선일보 계동 배달원 왕눈이의 보조생활을 했다. 나는 지금도 그의 본명을 모른다. 그는 우리 배달원 사이에는 이름 대신 '왕눈이'로 통했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기관차'였다. 그는 별명처럼 눈도 유별나게 크고 기관차처럼 힘도 억세게 좋았다. 이른 새벽 보급소에서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나서면 끝집까지 거의 쉬지 않고 뛰었다.
배달 첫 집은 계동 들머리 계산약국(지금의 현대사옥 왼편 대로변)으로 거기서부터 신문을 넣으면서 휘문 대동 중앙학교를 거쳐, 원서동 고개를 넘어 다시 내려와서 창덕궁 사무소에 넣으면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