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줄과 수줄이 만나 '영차 영차'

중요무형문화재 제26호 영산줄다리기 탐방

등록 2005.03.05 03:06수정 2005.03.06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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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줄과 수줄의 결합을 통한 성행위 상징화는 다산과 풍농의 염원이다. ⓒ 진홍

벌건 대낮에 암줄과 수줄이 만나 성행위를 합니다. 그것도 은밀한 곳이 아닌 수많은 인파가 모인 시끌벅적한 곳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나 봅니다. 서로 먼저 앞으로 나오라고 승강이가 여간이 아닙니다. 육두문자가 오가고 티격태격 싸우기까지 합니다.

반시간 이상을 기세싸움 하다가 결국 양쪽에서 양보하여 조금씩 앞으로 줄을 당겨 암줄과 수줄을 교합시키는 데 급기야 성공합니다. 사람들은 흥분과 쾌감으로 들뜨고 풍물소리는 더욱 요란스럽게 울려댑니다. 행여 빠지기라도 할세라 비녀목으로 단단히 결합시키고는 동 서 장군들의 명령에 따라 '영차! 영차!' 힘겨루기를 합니다.

지난 3일 우리나라 민속문화의 보고라 할 만한 고장인 경남 창녕군 영산 '3.1민속문화제'에 다녀왔습니다. 2월 28일부터 시작된 행사는 3월 3일 성황리에 끝났는데 영산줄다리기가 행사의 대미를 장식하였습니다.

전라도 지방에선 대부분 외줄로 줄다리기를 하는데 영산줄다리기나 기지시리줄다리기는 암줄과 수줄을 만들고 암줄은 줄 머리를 둥글게 틀어 '도래'라고 불리는 고리 모양을 만드는데 이는 여자 성기의 형상을 본뜬 것이고 여기에 수줄을 끼워서 비녀목으로 고정시키는데 남녀 간 성행위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음과 양의 조화를 통해 만물의 소생과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우리나라 민속문화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농경문화인 우리나라 민속문화는 성을 상징화된 놀이문화가 많은데 이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민중들의 염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전통시대엔 다산이 곧 생산력으로 직결되었기 때문에 성기 숭배사상이 나타났고 많은 민속놀이와 신라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나 삼척지역 등의 남근장승 등이 이를 실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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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이 지역 의병이었던 곽재우 장군의 복장으로 무장한 장군은 신명난 칼춤으로 비장한 각오를 다진다. ⓒ 진홍

중요무형문화재 제26호인 영산줄다리기는 동군과 서군으로 나눠 각각 장군을 선출하여 추대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곳에서 쇠머리대기 장군이나 줄다리기 장군은 시원찮은 벼슬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한번 장군으로 추대되면 평생 택호가 불리고 죽으면 관 속에 장군기를 같이 매장하는 전통이 있을 정도니까요.

현재 장군 복장은 홍의장군 곽재우의 의상을 본따서 1976년에 제정하였으며 장군이 가는 곳엔 풍물이 울리고 깃발이 나부끼며 군중이 따릅니다. 가끔 상대편 영역을 침범하기라도 하면 충돌이 일어나고 진잡이놀이에서는 기세를 세워 상대편을 제압하려고 하다 보니 부상자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번에도 실랑이와 작은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는데 암줄과 수줄이 결합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환호성입니다.

장군은 인격, 재력, 체력을 갖춘 사람 중에서 뽑는데 놀이를 신명나고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가는 역할과 더불어 많은 군중을 통솔하여 승기를 잡는 총수 역할을 합니다. 이와 같은 전투성과 민중 저항성 때문에 일제 강점 하에서는 줄다리기가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암암리에 골목에서 청소년들이 중심이 되어 줄다리기를 하였는데 3월 1일에 있은 '골목줄다리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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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랗게 늘어선 줄다리기 앞에선 서로 밀리지 않으려고 기세싸움이 치열하다. ⓒ 진홍

영산쇠머리대기에서도 청소년들이 겨루는 '작은 쇠머리대기'가 있는데 이런 점이야말로 영산을 민속문화의 보고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렸을 때부터 골목줄다리기와 작은 쇠머리대기를 통해 자연스레 자기 고장의 자랑스러운 민속문화를 전승해가고 있으니까요.

하루 전인 2일 만년교 앞 도로와 시장 통에서 하루 종일 영산줄 만들기를 하여 올해는 동부군이 밤새워 줄을 지켰다고 합니다. 낮 12시에 각각 줄고사를 지내고 거의 1km에 달하는 거리를 1시간 넘게 거대한 줄을 줄다리기 시연 장소인 '무형문화재마당'으로 끌고 왔습니다.

암줄과 수줄을 마주보게 놓은 뒤부터는 긴장감 속에서 난장이 펼쳐집니다. 서로 지지 않으려고 풍물을 두들기고 깃대싸움인 진잡이놀이가 격렬해집니다. 그러다가 상대편에게 깃대나 깃발을 빼앗기기라도 하면 다시 되찾아오려고 아우성과 몸싸움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난장이 펼쳐진 이곳에선 남녀불문 노소불문 누구나 신명이 나고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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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내내 복받고 건강할 거라며 환하게 웃는 67세된 할머니. ⓒ 진홍

그런데 줄다리기 시합은 허망할 정도로 싱겁습니다. 학교 운동회에선 줄 그어놓고 삼세판 겨루기를 하거나 반별 대항을 하여 시합 자체가 볼거리인데 전통의 줄다리기에선 몇 날 며칠 엄청나게 큰 줄을 만들어 채 10분도 안되어 승부가 판가름 나거나 무승부를 선언해버리니 겨루기 자체만 본다면 이해가 안 될 듯싶습니다.

그건 줄다리기를 통해 풍농과 마을의 안녕 그리고 화합과 단결을 꾀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승부 자체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줄다리기 시합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서 나왔는지 칼과 낫이 등장하면서 느닷없는 소동이 벌어집니다. 자신들이 금방 끙끙 잡아당겼던 젓줄을 끊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지네발처럼 가지런하게 나와 있던 젓줄이 금세 싹둑싹둑 잘려나가고 몸통만 남고 말았습니다. 암줄과 수줄은 군중들의 집단노동으로 힘겹게 만들어져 군중과 함께 한바탕 신명난 교접을 끝내고는 그 모든 것을 주민들에게 돌려줍니다. 이것은 거름으로 쓰면 풍농이 들고 소에게 먹이면 병이 안 걸리고 지붕에 얹으면 무사태평하다고 합니다. 예전엔 고기가 잘 잡히기를 바라는 마산에서도 일부로 찾아오거나 사 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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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전라도 영광에서도 달려 와 신명과 한 힘 썼으니 복 받을거외다! ⓒ 진홍

짚풀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줄다리기는 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주로 벌였습니다. 1941년에 출간된 <조선의 향토 오락> 통계에 따르면 줄다리기가 한강 이북 지방은 10퍼센트 정도인 데 반해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은 50퍼센트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논농사와 관련이 깊은 줄다리기는 줄을 뱀이나 용으로 간주하여 비가 많이 내리기를 바라고 또한 줄다리기의 성행위를 통해 다산과 풍농을 기원하였던 민중들의 소박한 민속놀이였습니다. 줄다리기는 가장 많은 군중이 동원되는 집단놀이이며 이를 통해 단결과 협동심을 기르고 화합과 상생의 정신을 배워 가는 가장 민중적인 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영산줄다리기 기능보유자인 김종곤(67세)씨는 줄다리기를 '지상 최대의 마당극'이라고 칭합니다. 현재는 규모나 인원이 많이 축소되었지만 예전에 줄다리기 길이가 100m 이상이 보통이었으며 경상도 지방 3.1운동의 최초 발상지이기도 한 영산에서 일제가 줄다리기를 금지시킨 건 군중의 힘이 어디로 향할지를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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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쇠머리대기와 풍물굿 등이 벽화로 그려진 아름다운 빌라. ⓒ 진홍

영산줄다리기는 93년 작고한 기능보유자 고 조성국 선생에 의해 서울 등 대학가에 많이 보급되었으며 이를 통해 민주화운동과 대동정신을 함양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최근엔 04년 '지구의 날' 대학로 행사와 2000년 한강고수부지에서 '매향리문화제'를 통해 환경과 반전운동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3.1정신을 이어받아 매년 개최되는 경남 창녕군 영산의 '영산3.1민속문화제'는 올해로 44회째였으며 영상줄다리기 외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5호인 영산쇠머리대기(필자의 04년 3월 3일 자 기사 '억센 영산의 힘, 영산쇠머리대기' 참조)와 구계목도, 문호장단오굿 등 민속문화가 어느 지역보다 풍부하게 보존 전승되는 지역으로 이름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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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억센 영산의 힘, 영산쇠머리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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